녹아드는 말 한마디
한창 근무 중이던 일요일, 뼈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다음날 종암서로 출근하라는 지시였다. 그리고 며칠 뒤 선배는 출근서 지정은 최대한 그 경찰서에서 많이 만나보라는 취지이니 라인 내에서 다른 서로 자유롭게 넘나들어도 된다고 했다. 신당역 사건 당시 라인 내 경찰서 한 곳만 다니게 했던 김 선배의 교육 방식을 바이스가 질타했고, 그 영향으로 내려진 지시라 짐작했다.
그렇게 처음 종암서로 출근하게 되었는데, 신길동에 살던 내게는 접근성이 좋지 않았다. 당시 종암서는 청사를 신축하기 위해 임시청사로 이전한 상태였는데 주택가에서 찜질방으로 쓰이던 건물이었다. 무심코 지나치다 보면 이곳이 경찰서인지 알아채기도 힘들었다. 내부 공간은 당연히 대부분 리모델링이 된 상태였는데, 화장실은 찜질방으로 쓰이던 그대로였던 것 같다. 화장실에만 가면 찜질방 특유의 냄새가 풍겨왔다.
뼈 선배는 마와리 지시를 하며 신당역 관련 차출될 수 있으니 참고하라고 했다. 차출은 없었다. 한 주 동안 총도 맞지 않았다. 준비 중인 단독을 추가 취재하고, 마와리를 돌 수밖에 없었다. 종암서는 마와리도 쉽지 않았다. 노크맨답게 경찰서로 잠입한 뒤 여기저기 문을 두들겼지만 쫓겨나기 일쑤였다. 그나마 이전에 동대문서 과장님 한 분께서 소개해주신 팀장님 한 분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동대문서 과장님은 라인을 옮긴다고 하니 종암서에 친한 후배를 만나보라고 해주셨었다.
오전 내내 종암서 안을 헤집고 다녔지만 그다지 소득이 없었다. 본서집착남 선배에게 길들여져 본서에 남아있고 싶었지만 보고를 채워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점심을 먹으며 지파 이동 경로를 짰다. 힘들게 지파를 돌아봤지만 여전히 소득은 없었다. 교육 중이라거나 지구대장이나 파출소장이 부재중이라 응대할 수 없다며 또다시 쫓겨났다.
종암파출소에서도 훈련 중이라며 파출소 안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터덜터덜 언덕을 내려오는데 성북소방서가 보였다. 어차피 다른 지파에 가는 경로에 있으니 무작정 가서 보고를 한 줄이라도 더 채우자는 생각에 소방서로 향했다. 마와리 3개월 차에게 못할 일은 없었다.
민원실 앞에서 예방과에 근무하는 소방관 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다행히 고생한다며 격려를 해주시며 따듯하게 맞아주셨다. 기사를 보며, 평소 취재하며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봤고 친절히 알려주시고 장비들도 구경시켜 주셨다. 기사가 될만한 사고는 상황실에서 가장 잘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상황실에 근무하는 분들도 소개해달라고 했다. 소방관께서는 전화로 상황실에 물어보셨지만 오늘은 어렵다는 답변을 전해주셨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다음 지파로 향했다.
보고를 받은 뼈 선배는 소방서도 직접 찾아간 것이냐고 물었다. 마음대로 경찰이 아닌 소방을 만났다고 혼나지 않을까 싶었다. 이동하던 중에 보여 잠시 들러봤다는 말에 뼈선배는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했다. 이날부터 이동 경로에 소방서가 보이면 습관적으로 들르기 시작했다.
종암서에는 지구대/파출소가 많지 않았다. 성북구 내에 경찰서가 두 곳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지파 순회를 마치고 본서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기 전 마지막 지구대에 들러 다행히 팀장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당시 관심 있던 경찰의 각종 장비에 대해서도 현장에서 체감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지구대에서 나와 뼈 선배에게 보고를 마치고 본서로 향하던 중 선배에게 새로운 지시를 받았다. 타사에서 보도한 단독 기사를 확인해 보라는 것이었다. 보통 라인 내에서 타사 단독이 나가는 경우 경찰에 해당 기사 내용이 맞는지 확인하고 추가적인 내용을 취재하게 된다. 골목길 한가운데서 딱히 앉을 곳이 없던 나는 습관적으로 그대로 바닥에 앉아 질문지를 작성하고 취재를 해 보고를 올렸다.
통화내용 워딩을 풀며 보고준비를 할 때 순마 한 대가 다가왔다. 조금 전 내가 다녀왔던 지구대 순마였다. 순마에 타고 있던 지구대 형님은 순마에 달린 스피커로 내게 말했다.
“기자님, 위험하니 안쪽으로 들어가세요.”
머쓱했던 나는 노트북을 들고일어나 길가 가장자리로 이동하며 순마에 대고 인사를 했다. 그래도 한 번 다녀간 기자라고 조수석에 타고 있던 형님은 창문을 내리고 웃으며 힘내라고 말했다. 여기저기서 쫓겨나기만 하며 움츠러들었던 마음은 이렇게 별거 아닌 힘내라는 말에 녹아들고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