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발자취를 새긴 도종환의 시잡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나의 인생은 꽃일까? 아니면 향기일까? 어렵지만 단순한 질문에서부터 책을 다시 시작했다.
참교육의 함성을 처음 접하고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끝자락과 90년대 격변기의 갈림길에서 방황하기도 했으며, IMF경제 위기의 아우성 소리를 들으며 신자유주의의 보이지 않는 폭압 속에서 다시 흔들리고 떄로는 망설이며, 가끔은 밟히기도 하는 경쟁에서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도 지금까지 그럭저럭 살아오고 있는 나의 인생은 어쩌면 시인의 인생과 많이 닮아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본다면 '세상에 부끄러움만은 없어야 된다'는 알량한 자부심과 항상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 한 후회'를 제외한다면 나와 시인은 서로 다른 인생을 걸었다. 똑같은 상황에서 선택을 다르게 하고, 선택을 다시 정당화 하기 위하여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하는 인생이, 50이 되어 뒤를 되돌아 보았을 때 이미 그 간격은 상당히 벌어져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부끄러움이 몸 속의 구멍구멍 속에서 치밀어 오를 수 밖에 없는 지금. 과연 나의 인생은 꽃이었을까? 만개하는 외적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만 언제 질지 모르고 밟힐 지 모르는 위험스런 상태를 어쩔 수 없이 가져야 하는 꽃처럼 말이다. 세상 사람들의 정신을 감화 시키는 보이지 않는 힘, 밟을 수도 꺽을 수도 없는 향기가 아닌 꽃의 인생이 바로 대부분의 인생이 아니었을까?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에는 도종환 시인의 인생이 담겨 있고 인생의 책장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써 내려간 시들 속에는 시인의 삶의 과정이 다큐멘터리 처럼 펼쳐져 있다. 시집이 시집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시인의 책에는 시 이상의 철학이 담겨 있기에 다른 어떤 시집보다 나의 마음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골이 깊다. 왜 시인은 어려운 선택을 하고 힘든 고난의 여정을 자처했는지, 그 속에서 어떤 마음의 갈등과 싸워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 보게 만들고 이미 벌어진 간극을 조금이나마 매울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조언하는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기에 시인의 책은 단순한 책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의 가난과 교사 생활의 열정과 학생들을 위한 인고의 선택, 가족과 투쟁의 선택의 기로, 이별과 새로운 사랑,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투쟁, 그리고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미래까지... 시인이 순탄하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삶의 한 복판과 가장자리를 오가며 참여하고 바라보고 느낀 관조의 힘 때문이었을 거다. 그런 심리적인 아픔과 방황을 겪었기에 시인 스스로도 자신을 태백산 주목이 아닌 이리저리 흔들리는 들꽃이라고 얘기하지 않았을까?
세상의 누가 풍랑을 겪으면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어려움 속에서도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배의 머리를 돌리거나 수면 아래로 스스로 침수해 버리기 보다는 조금씩 빛을 향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선택할 수 있는 용기 때문이며 그런 인생을 걸어온 사람들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이 독자에게 원하는 것은 바라보는 것에 머무는 경외감보다는 서로를 의지하며 벽을 오르는 담쟁이처럼 우리도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같이 가는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 지나 온 과거에는 그런 선택의 과정을 인생속에서 겪었지만 우리는 '용기'가 없어 결국 선택하지 못했고 시인이 찾는 인생의 친구가 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시인의 돌아온 삶을 알리는 역할보다는 다가 올 미래를 함께 하는 친구를 다시 찾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우리에게 던지는 것이라고 할까? 꽃이 아닌 인생의 항해에 젖지 않는 향기로 남을 수 있도록 말이다.
새벽 한 켠에 홀로 불을 켜며 30년 전의 인생을 다시 생각해 보고 나를 다시 생각하게끔 만든 책. 단순히 시인을 <접시꽃 당신>의 도종환이 아닌 우리의 현실을 몸소 체험한 이 시대의 인간으로서의 도종환으로 다시 보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나의 과거가 자꾸 오버랩 되는 것은 아직 나의 머리 속에 인생의 선택에 대한 회한과 희미한 희망이 남아서일까?
시는 '내 인생의 마지막 보루'라고 항상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를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깨우쳐 주게 만든 책. 시인의 시들이 읽는 순간 내내 마음 속에 차곡히 쌓였다. 꽃은 지고 아름다운 향기는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