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다 키핑 이전의 인간으로서 중요한 것들, 손석희의 장면들을 읽다
글을 쓴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마지막 글을 보니 지금까지 5개월이 지났고, 책과 관련된 글을 쓴지는 7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아무런 글도 쓰지 않았다. 한국으로 귀국하고 새롭게 준비한 일들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핑계도 핑계지만, 글을,.. 그냥 쓰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우리 사회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2014년 봄의 트라우마를 다시 떠오르게 만드는 불행도, 우리는 다시 겪었다. 비록 글은 쓰지 않았지만 눈과 귀는 세상과 단절시키 것만은 주저했다. 그럴수록 계절의 변화 못지 않게 우리 사회의 변화, 사람들의 변화, 그리고 그 변화를 움직이게 만드는 실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나름 각성의 시간을 보낸 것 같다. 그러면서 지금은 뉴스에서 볼 수 없는 언론인 손석희의 언론관을 거듭 거듭 떠올렸다.
장면 #1
여러 지면에 써왔던 내용이지만, 나의 기억속에서 절대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다. 2014년 봄, 출장을 위해 강원도 원주 문막의 산골 길을 가면서 잠시 들러 점심을 하려했을 때 벽에 매달려 있는 작은 TV속 큰 여객선이 바다에 뒤집혀 있던 그 장면. 그 장면은 나의 인생에 마음 한 켠에 잊혀지지 않는 큰 생채기를 냈고, 우리 사회 역시 그 일로 인해 큰 변화를 맞이했다.
장면 #2
대통령 선거 분위기가 달아올랐을 때 TV 속 유력 후보가 KTX 자리 위에 신발을 신은 채 발을 뻗고 있던 장면. 그 장면 하나가 정치적으로 중립을 표방했던 나에게 돌 하나를 얹은 무게감으로 다가왔었고, 옛말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라는 말을 절실히 실감하게 만들었다. 그 사람의 인생 전체는 몰라도 그렇게 중요한 시기에 마음대로 다리을 펴고 다닐 수 있는 정도라면, 그 사람이 바라보는 인간에 대한 인식은 발길질 하나, 손지검 하나, 검사의 펜대 하나에 충분히 여러 사람 잡을 수 있겠다는 야수의 본능을 보았다.
장면 #3
정치적인 사건으로 보자면 많은 일들이 있어 뚜렷하게 각인시키지는 못한, 나름 충격이 덜한 소재거리였지만, 검언유착을 뼈저리게 보여준, 하지만 어떠한 사유로 무혐의로 일관하면서 마무리 된 채널A 기자 취재윤리 위반 사건. 기자와 검사가 오간 카톡 내용과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악취가 심하게 나는 곳이 언론과 법조인이라는 말을 절실히 느껴야 했다. 그러면서도 버젓이 사과 한 마디 없이 남을 단죄하는데 법 지식을 활용하는 법 기술자들과 글쟁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실소를 금치 못하게 만드는 남다른 소질을 지녔다.
이런 나름대로의 장면들을 기억에 간직하면서 언론인 손석희를 떠올린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MBC 노조위원장으로 정부의 언론 탄압에 맞섰고, 시사 프로그램의 장수 진행자이면서 진보 보수 모두에게 인정받는 몇 안되는 언론인. 많은 유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야할 길은 언론 하나임을 이야기 했던 양심있는 사람으로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내세운 어젠다 키핑이나 정론 직필의 이야기는 언론 스스로가 주위로 부터 자유로울 때 할 수 있는 먼나라 이야기 인지 모른다. 세월호 사건처럼 무리할 정도로 집착한 어젠다 키핑이 결국은 사람들의 망각을 늦추는 효과는 있었을지 몰라도, 사회가 요구했던 진실에 다가가는 노력은 보수를 지나 나름 진보 정권에서도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젠다 키핑에 피곤해 했고, 진실에 다가가는 것은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에서의 성숙하지 못함으로 그것을 다룬 손석희는 결국 언론인으로서의 올바른 자세만을 인정받은 셈이다.
지금 대부분의 언론은 나와 다른 편을 물고 늘어지고, 정치적 강자 뒤에 숨어 기회를 엿보는 하이에나 때들과 마찬가지다. 사자가 다른 무리의 사자와 맞붙어 싸울 때, 자기가 따라다녔던 사자가 다른 강자에 놀아나는 역전의 상황이 오면, 다시 새로운 강자에 붙어 맞은 편 사자의 살점을 거침없이 물어뜯는 그 하이에나들 말이다. 그래서 언론은 사회가 변해도 끝까지 살아남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언론에게 어젠다 키핑과 같은 미디어 교과서적 인 말보다, 사실, 공정, 균형, 품위 이 네 단어가 더 중요한 말이 아닌가 싶다. 사실인가를 확인하고, 공정한가를 살피고, 보수 진보 자기가 속한 편에 치우치지 않았는가를 뒤돌아 보고, 마지막으로 언론인으로서, 언론인 아빠이자 가장으로서 모범이 될 만한 품위를 지녔는가를 성찰하는 아주 기본적인 내용을 새기지 않는다면 학교에 배운 많은 언론이 취하는 취재윤리나 방법들은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수 개월의 글쓰기 공백기를 다시 여는 글을 언론과 관련된 글을 쓴다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을 꾹 삼키는 대신 언론인 역시 인간이기에 인간의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 논한다는 것이 초등생적인 발상이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지금 말로 하지 못하는 것을 글로 쓴다는 것에 약간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왜 우리는 언론을 변화시키지 못했을까? 독재정권을 지나 문민정권을 수립하고, 다시 보수에서 진보로, 다시 극우 보수로 턴 하는 동안에 왜 우리 사회는 언론만은 정론 직필이라는 단순한 명제마저 관철시키지 못했는지 자문해 본다. 자본주의의 생리상, 우리나라 정치의 지형도의 특성, 다이나믹한 사회 문화는 뒤로 하더라도 일제 시대의 잔재가 남아있는 이상 그것이 완벽히 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안일함이 오늘 날 언론을 가장 개혁해야 할 대상이 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글을 쓰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언론인의 양심을 파는 기레기들의 웃음 소리는 기자실에서, 회의실에서, 주점에서, 룸싸롱에서 계속 들릴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인간의 본성 4단(측은, 수오, 사양, 시비) 을 적어도 지킬 줄 아는 양심있는 언론인이 포스트 손석희로 다시 만들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