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azy Factory 4화] 그리운 유년시절의 추억
12년의 서울살이를 끝내고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오고선 이삿짐을 정리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가족과 함께 살았던 집에 이젠 덩그러니 나 혼자 남겨진 것이 영 어색하게 느껴지기만 한다.
좁은 원룸이 아닌, 훨씬 넓어진 공간이었지만
생전의 부모님이 쓰셨던 안방은 그대로 두고
원래 썼었던 작은 내 방에 몸을 뉘었다.
공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짐 정리를 계속하다
잊고 지내던 유년시절의 낡은 일기장을 펼쳐보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가득한 일기장,
부모님의 젊은 시절이 담긴 옛 사진앨범을 어쩌다 보게 되면
한동안 마음이 먹먹해지기도..... 때론 웃음 짓게 되기도 한다.
완전 꼬꼬마 시절에는 순수 그 자체여서,
부모님의 말씀이 컴퓨터의 입력 -> 출력과 같았다.
"어른을 보게 되면 인사를 잘해야 돼."
"아~그런데 모르는 사람을 봐도 인사하는 거예요?"
"응... 모두 인사해."
..... 이 말씀에 한동안 나는 만나는 모든 어른들에게 인사를 했다.
길거리를 뛰어가면서도 "안녕하세요!!"하고 우렁차게 인사하니
인사를 받아주는 분들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당황해하셨던 기억이 난다.
장난기 많던 개구쟁이 시절에는 친구들이 우리 집 마당으로 몰려와
같이 노올자~!! 하고 소리쳤었다.
미리 약속된 것도 아니었지만 그 외침을 들으면 기다렸단 듯이
신나게 나가서 땅거미가 앉을 때까지 뛰어놀곤 했다.
생일에는 부모님이나 삼촌이 벽걸이 달력을 접어서
고무줄을 끼워 고깔모 왕관을 만들어주셨었다.
유치원에선 같은 달 생일자들을 모아
단체 생일 축하를 했었다.
사탕 목걸이를 매면 왠지 모르게
부자가 된 것 같았고 기분이 좋았다.
지금은 오목 두는 사람을 보기 힘든데 그 당시엔 무려
'오목 대회'라는 것이 우리 동네의 백화점에서 열렸었다.
평소에 오목을 자주 두어서 자신이 있던 나는
형과 같이 출전해서 형은 예선 탈락의 고비를 마시고
난 3등을 수상하게 되었다.
매번 명절에는 시골 할아버지 댁으로 갔었는데,
그 시절의 교통 체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지금은 1~2시간이면 갈 거리를 10시간 가까이 소요해야 했다.
어느 날은 먼 친척 어르신들을 뵙는다고 몇 군데 집을 들렀는데
차 안에서 난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잠들어 있었고,
곤히 자는 나를 깨우지 않고 어른들만 잠시 내리셨다.
잠시 후 잠에서 깬 나는 혼자 있어서 깜짝 놀랐고
내려서 어른들을 찾는데 어딘지도 모르고 무척 당황했다.
인근에 보이는 저택 앞으로 걸어가니 흡사 사냥개처럼
사납고 덩치도 큰 맹견 여러 마리가 날 보고 미친 듯이 짖어대는 것이 아닌가.
4~5 마리 정도가 목줄도 매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너무 무섭고 겁에 질려서 몸은 얼어붙고
엉엉 소리 내면서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어쩔 줄 몰라하던 그때........
정말 동화처럼 근처에 있는 줄도 몰랐던 소 한 마리가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나와 그 맹견들 사이를 가로막아섰다.
날 지켜주려 한다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지면서
그 소의 배와 등을 끌어안고 계속 흐느껴 울었다.
개들의 짖음은 점차 줄어들었고.........
그렇게 잠시 후에 어른들이 날 먼저 발견하시곤
대수롭지 않은 듯 다시 차에 타라고 하셨다.
한참이 지나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씩 그때의 따뜻했던
소의 품 안이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도 소를 길러서 자주 봤었는데
큰 눈망울에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참 순한 성격,
여물을 주면 묵묵하게 씹는 모습이 참 정감 가고 좋았다.
소 친구, 그때 정말 정말 고마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