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루에 몇 번의 소비를 할까? 선택을 위해 얼마만큼의 고민을 하고 어떤 가치 기준에 따라 결정을 내릴까? 편의성, 경제성, 익숙함, 여유 시간, 괜한 거부감과 윤리 문제 등 여러 요소를 복합적으로 고려하여 결론에 다다를 것이다. 아주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고민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대단히 합리적이지도 그다지 도덕적인 사람도 아니어서 고민이 더 많은 걸까? 예를 들면 이런 고민들이다.
첫 번째 고민, 머리를 감으려고 보니 샴푸통이 비어 간다. 리필 제품을 파는 곳이 많지 않고, 전에 샀던 제품은 향과 세정력이 아쉽더라. 리필 제품 전용 샵은 멀어서 차를 타고 가야 한다. 플라스틱을 사용을 줄이기 위해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건 좋은 일일까? 한두 사람이 승용차를 운행하는 것보다는 택배 구매가 환경에 더 이로운 걸까?
두 번째 고민,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차를 한잔 마셔야겠다.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면서 할인도 되니까 개인 컵을 챙겨 가야지. 얼그레이 밀크티를 마셔 볼까? 우유 대신 두유로 바꾸면 원래 가격이네. 맛은 있는데 사무실에서는 처리가 번거롭긴 하다. 티백도 처리해야 하고 거품이 잘 닦이지 않으니 오늘만 일회용 컵으로 마셔도 될까?
세 번째는 메일을 확인하면서 든 생각이다. 끝없이 날아오는 광고와 스팸은 바로바로 지우고, 사실 이제 중요한 메일도 없어서 우편 대신 받는 고지서 정도만 확인하면 된다. 그런데도 총 5GB의 용량 중에 1GB를 사용중이라고 한다. 서버가 차지하는 땅이 점점 늘어가니 데이터를 지우는 것도 환경에 보탬이 된다고 들었다. 바닷속에까지 서버를 넣는 시도를 했다니까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 나중에 필요할만한 메일을 제외하고 삭제하자니 번거롭고 귀찮다. 아, 어쩌지?
네 번째 고민은 퇴근길에 들른 포장 음식 가게에서다. 다회용기까지 가지고 다닐 수는 없다.장바구니가 있어서 비닐봉지는 없어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느새 일회용 젓가락을 넣어 주셨다. 다시 꺼내놓기도 하고 체념하고 가져가기도 한다. 케이크를 살 때면 멈칫하는 사이에 플라스틱 빵칼이 딸려 온다. 일회용품을 받지 않으려면 분주한 점원분께 말할 타이밍을 놓치지 않도록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이런 고민들은 의식 있는 사람이고 싶은 욕구와 나도 모르게 배어든 신념 때문이기도 하고 책에서 배운 것들을 실천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살아가는 동안 가능하면 환경을 덜 망치고 싶다는 마음과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기업을 응원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다. 그렇지만 결정에 대한 부담과 피로감도 만만치가 않다. 감당할 것인가, 다음으로 미룰 것인가?
게다가 내가 선택했던 기업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게 밝혀지면 문제는 더 어려워진다. 나의 선택도 머리 아픈데 내가 지지하는 대상의 잘잘못까지 따져봐야 하는 번거로움이라니.수시로잘못이 폭로되고 소문은 무성한데 사실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어떻게 판단을 내릴 것인가.
고민이 이어지던 차에 도서관 서가에서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가벼운 농담과 유쾌한 일러스트를 버무려서 어려운 주제를 심도 깊지만 지루하지 않게 다루고 있었다. 책에서는 윤리적 딜레마 상황에 봉착할 때마다 ‘무엇을, 왜 그렇게 하고 있을까? 더 잘할 수는 없을까? 그것은 왜 더 나은 행동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도덕 철학과 윤리학이라고 정의한다.
학대를 당하는 어린아이를 보고 남 일이라며 아무런 동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과 너무 화가 나서 학대자와 그 집안 사람들에게까지 연대책임을 물어 똑같이 폭행하고 학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느 쪽이 윤리에 가까울까? 극단의 반응이 난무하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너무 냉소적이거나 또는 지나치게 과격하거나. 그 어느 쪽도 살고 싶은 세상은 아니다.
이런 물음에 대한 힌트로 제시한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이다. 저자는 이를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성가시고, 가장 모호하지만 가장 우아하며, 그러면서도 정말 화가 나는 개념’이라고 소개했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합당한 대상에게 적당한 분노를 가지는 것이 곧 윤리이자 중용이라는 것이다. 중용을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학습과 사고 그리고 탐색’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저자는 난해함과 피로감을 무릅쓰고 그냥 넘어가지 말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자고 권유한다.
위로가 되는 건 윤리학은 공짜이며 면허증도 필요 없어서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점, 분노나 연민과 같은 윤리적 자질들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의문을 품는 것 자체가 이미 한걸음이라는 응원이었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다독임도 힘이 되었다. 이 사회는 너무 복잡해서 선한 의도로 한 행위가 부정적인 결과로도 이어질 수 있으며, 도덕적 행위는 본질적으로 실패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소개한 사뮈엘 베케트의 시 구절을 보자.
다시 시도하라. 그리고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
저자는 윤리적인 고민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삶의 여유가 있음을 반증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윤리적인 딜레마 앞에 정답은 있을 수 없고, 대개 잘못하기 마련이지만 생각하는 일에 가치가 있음을 알았으니 지치지 말지어다.무게감이 버겁고 어쩌면 소심하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이 책을 통해 귀찮은 고민을 계속할 약간의 용기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