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바뀌어야 한다

by 신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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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파의 딸들(Four Daughters, 2025)

인간은 과거와 결별할 수 없다. 나는 과거와 화해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용서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인간에게는 과거에 붙들리거나 넘어서는 선택지 중 하나만 존재할 뿐이다. 올파 함루니와 두 딸은 삶을 증언하고 기록하는 방식으로 상처를 극복하기를 택했다. 그녀들은 영화 곳곳에 도사린 예리한 질문들에 본인을 내던진다. 질답이 이어지는 건 상투적인 교훈 때문이 아니다. 더 이상 상처를 껴안은 채 살아갈 수 없어서다. 그렇기에 질문에 뒤따르는 모든 대답은 서투르고 때로는 비상식적이다. 애초에 삶을 도덕과 규율 안에 가두는 일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상처의 대물림은 필연적으로 비극을 낳는다. 하지만 이야기는 비극의 정점을 지나서도 계속된다.


상처받은 이는 누구에게든 대갚음하기를 원한다. 여기서 더 나아지기 어렵다는 생각을 곱씹다 보면 모두가 불행하기를, 아니면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불행하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 인간의 나약한 마음이다. 하지만 개중 누군가는 결코 반복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심장에 맺힌 약속은 시대의 등을 떠민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극 속에서도 세상은 후퇴하지 않는다. 몇몇에 의해 우리 시대의 톱니바퀴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인용하자면 '인간의 정신이 앞을 향한 진전을 시작한 이후 어떤 이방인의 침입도, 어떤 압제자들의 동맹도, 어떤 편견도 인간을 뒤로 돌아가게 만들 수는 없었다.'¹


벤자민 콩스탕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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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All We Imagine as Light, 2025)

도시에는 빛이 머무르지 않는다. 더께가 앉은 탓인지 낮에도 빛이 들지 않는다. 건물 안에 갇힌 채 조명에 의지한다. 티 없이 밝은 전깃불을 나와 거리를 다닐 시간은 이미 밤이다. 그저 어른대는 영화의 실루엣을 쥐다 만 기분이다.


나를 몰입하게 만든 건 인물이 아닌 배경이었다. 시시각각 내리쏟는 비와 어른대는 냉기 사이를 쥐어짜듯 몰아붙이는 습기, 태양빛은 아플 정도로 날카롭고 밝다. 후덥지근한 거리, 잦은 비로 깎인 건물 덕분에 후락한 분위기를 벗어날 수 없는 골목, 골목. 제각각 화려한 싸구려 행상은 길목일 뿐 목적지를 향해 뛰어도 묘한 부유감을 피하기는 어렵다. 나를 들뜨게 만들다 주저 앉히는 유치한 설렘, 얼굴 없는 인파가 겹겹으로 쌓여 이룬 도시는 내가 모르는 말과 행동으로 쓸쓸함을 부추겼다.


지난 가을과 초여름 차례로 다녀온 괌과 대만을 인도의 거리 위로 덧씌운 채, 나의 기억 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문득 이렇게 계속 세상이 넓어져도 괜찮은 걸까 걱정스러웠다. 내게는 아직 서울도 겉핥기에 불과한데, 이국의 도시들을 이렇게 가깝고도 멀게 느끼는 게 수상할 정도였다. 지면서 살아가는 게 삶이라지만 희망을 아주 놓아본 적은 없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바람 속에는 비릿한 열패감이 배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희망과 자족감, 모두 차치하고 우리는 빛이 드는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 도시가 상징하는 그 무엇에 붙들리지 않을 자신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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