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화 읽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경 Apr 26. 2024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영화 『케빈에 대하여』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빨간색과 파란색

영화는 흰 커튼이 나풀거리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곧바로 새빨간 색이 가득 찬 토마토 축제의 장면을 보여준다. 에바는 황홀한 표정으로 토마토 축제를 즐긴다. 갑자기 그녀를 비난하고 욕하는 소리가 겹치며 에바는 침실에서 일어난다. 침실은 여전히 붉은 색감으로 가득하다. 에바는 집 밖으로 나가 그녀의 새하얀 집이 누군가에게 빨간 페인트로 무참히 테러당했음을 확인한다.


이 지점쯤 도달하면 영화에서 색깔이 중요한 장치로 사용되리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에바가 등장하는 장면의 색감은 주로 빨간색으로 구성된다. 마트에서도 굳이 토마토 캔이 나열된 진열장 앞에서 멈춰 선 에바의 얼굴을 보여주는 식이다. 반면 그의 아들인 케빈은 파란색으로 표현된다. 그는 대부분 푸른색의 옷을 입고, 그의 방은 푸른색의 벽이다.


이 외에도 노란색이 실리아라는 인물과 과녁의 중심, 자물쇠, 동화책의 표지 등 여러 중요한 소재들에 사용되기도 하지만, 우선은 빨간색과 파란색의 대조에 초점을 두자. 무언가의 대립을 나타낼 때 이 두 가지 색의 대조만큼 시각적으로 분명하게,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이 또 있을까.



케빈에 대하여?

<케빈에 대하여>는 에바와 케빈의 대립을 보여준다. 케빈은 어린 시절부터 유독 에바에게 교묘하고 섬뜩한 방식으로 강한 적대감을 표현한다. 에바는 그런 그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지만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을 여러 번 보이기도 한다. 혹자는 사이코패스나 순수악의 탄생, 그런 아들을 둔 어머니의 심정에 초점을 두고 영화를 읽어낸다. 케빈을 사이코패스나 악인에 위치시키는 해석은 너무 단순하고 영화의 많은 요소들을 간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넷플릭스의 소개글이 상당히 아쉽다. “15살 아들의 잔인한 성격이 폭력으로 이어지자, 과연 아들의 행동에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할지 어머니의 치열한 고민이 시작된다.” 이 소개글이 자아내는 영화에 대한 기대가 영화의 독해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잔인한 성격이라는 표현은 케빈의 폭력적인 행동을 단순히 그의 내재적(선천적) 특성에 국한하여 생각하게끔 한다. 또한 영화에서 에바가 어머니로서의 책임감을 고민했는지도 의문이다. 그런 고민이 충분히 보였는지도 모르겠고 영화의 초점은 그런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면 우선적으로 케빈에 대해서만 생각하기가 쉽다. 케빈은 어린 시절부터 에바에게 적대감을 표현한다. 엄마라고 불러보라는 말에 No를 연신 외치고, 에바를 더 힘들게 만들려는 듯 기저귀를 갈자마자 일부러 똥을 싼다. 에바를 바라보는 케빈의 눈빛은 매번 싸늘하고 날카롭기만 하다. 그의 행동은 쉽게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인지 표면적으로 눈에 띄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우리의 시선을 잡아챈다. 또 영화 자체가 그녀의 현재와 회상이 뒤섞여 전개되기 때문에 그녀의 시각에서 케빈을 영화의 초점화된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기 쉽다. (영화의 제목도 <케빈에 대하여>가 아닌가.)


그러나 에바의 시선으로 케빈을 바라보면 그의 행동은 불가해한 것으로 남기 쉽다. 그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운, 명확한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적대감의 표현일 뿐이고, 그래서 그는 그저 섬뜩한 사이코패스라는 단순한 결론에 이른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그럴수록 에바의 행동은 이해 가능한 것으로 시야에서 가려진다는 것이다. 과연 적대감을 표현하는 것은 케빈뿐인가. 사실 에바도 케빈의 행동에 분노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에게 터뜨리는 순간이 여럿 등장하지만, 그런 행동의 의미를 좀처럼 생각할 겨를을 가지지 않는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들에 대한 반응으로, 그녀의 행동을 (얕게) 이해해 버리고 지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에바에 대하여

케빈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이해하려면, 오히려 공들여 이해할 게 없어 보이는 에바를 제대로 이해한 후 케빈을 바라보아야 한다.  케빈은 에바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미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에바는 그런 그에게 그래도 다가가려고 하는 듯 보이는데 정말 그럴까? 에바는 케빈을 사랑할까?


에바는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니는 여행가였고 의도치 않게 케빈을 임신했다. 그녀의 일상은 육아에 매이게 된다. (프랭클린은 굉장히 가정적인 아버지인 것처럼 등장하지만 한 번도 육아를 함께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육아의 고단함을 호소하는 에바에게 공감해주지 못하며, 그는 영화 내내 자녀와 노는 모습만을 보일 뿐이다.) 그녀는 쉴 새도 없이 울어대는 어린 케빈을 유모차에 데리고 시끄러운 소음이 들리는 공사장 옆에 오랫동안 서 있는다. 그 소음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우선 그 당시의 케빈을 더욱 울도록 만들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에바의 표정은 공사장의 소음 속에서 오히려 더 안정을 찾는 듯하다. 그녀에게 공사장의 소음은 지긋지긋한 아기의 울음소리를 묻어주는 도피처였던 것이다.


에바에게 케빈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는 그녀의 대사를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 말을 이해할 정도로 자란 케빈에게 "난 네가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 너도 알지? 매일 아침 이런 소원을 빌어. 여기가 프랑스였으면 좋겠다."라고 말을 한다. 그녀는 케빈이 태어나기 전 여행가로서의 삶을 그리워한다. "익숙한 거랑 좋아하는 건 달라. 엄마도 나한테 익숙하잖아."라는 케빈의 말을 보면, 케빈은 어린 시절부터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에바는 그런 그의 말에 굳이 부정하지 않으며 케빈에게 본인의 마음을 다시금 확인시킬 뿐이다.


에바는 그저 어머니로서의 역할 수행을 부단히 노력할 뿐이다. 에바가 케빈에게 외출을 제안하는 장면이 이를 잘 보여준다. 미니 골프와 저녁 식사로 구성된 그 외출은 지극히 기계적이고 형식적이다. 케빈이 홀에 공을 넣자 에바는 깃발을 꽂고 재빠르게 사라지고, 식사 시간에는 학교 생활은 어떤지, 요즘 좋아하는 선생님은 누구인지 등 어색한 질문을 던질 뿐이다. 케빈도 그녀의 태도를 그저 비웃는다.



사랑받고 싶은 아들

케빈은 엄마가 본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재빠르게 눈치챘을 것이다. 그런 케빈이 에바를 향해 표현하는 감정은 표면적으로는 분노, 적대감이겠지만, 그 안에는 오히려 본인에게 관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지 않을까. 범행을 저지르고 난 이후의 케빈은 TV에서 "내가 말 잘 듣는 범생이로 나왔으면 지금쯤 채널을 돌렸을 것 같지 않아?"라고 시청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는 에바를 향한 케빈의 행동에도 적용된다. '내가 반항하지 않았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엄마가 과연 나를 바라봤을까?'


케빈이 에바의 방을 망치는 장면이 이 심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케빈이 어린 시절 에바는 모든 벽에 세계지도를 붙여 자기만의 방을 꾸민다. 여행가로서 세상을 여행하고 싶은 그녀의 소망이 고스란히 담긴 방이지만, 케빈은 세계지도에 페인트를 물총으로 쏴 그녀가 꾸민 방을 망친다. 세계지도는 페인트로 무참히 덮어버리는 행위는 표면적으로는 그저 이해하기 어려운 괘씸한 반항일 것이다. 그러나 이면에는 여행가로서의 삶을 원하는 에바의 소망을 좌절시키고자 하는 케빈의 욕망이 있다. 그 이유는 그녀가 집에, 그의 주변에 남아있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닐까.


분명하게 드러나는 실리아에 대한 질투도 그가 에바에게 관심받고 싶어 한다는 또 하나의 근거다. 세수 장면에서 좀처럼 표정이 동요하지 않는 케빈의 얼굴에 강렬한 표정이 나타난다. 이 장면은 실리아와 부모의 화목한 장면 이후 바로 배치되는데, 케빈은 질투 어린 표정으로 입술을 연신 씰룩댄다. 싸늘함을 일관되게 유지하던 이전까지의 표정과 비교해 보면, 숨기지 못할 정도의 격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맥락으로 케빈의 범행을 읽어내면, 이는 에바의 삶을 파괴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에바가 본인에게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녀를 죽이지 않고 남은 가족들만을 죽인 이유, 그가 체육관에서 나와 체포되기까지 주변을 살피며 에바를 찾는 이유, 잡혀가는 경찰차에서도 에바를 응시하는 이유. 모두 그녀가 그를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다.



이제는 말해줘, 왜 그랬니?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해서 머리를 맴도는 질문이 있다. '너는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이해하기 어려운 케빈의 행동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드는 의문이다. 영화의 매 장면 제발 에바의 입에서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하는 거야?'라는 질문이 나오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에바는 질문하지 않는다. 케빈의 행동에 고통스러워하고 불안해하면서도 절대 질문하지 않는다. 그건 그녀가 케빈에 대해서 애정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케빈이 힘들게 만들고 곤란하게 만든다는 사실만이 그녀에게 중요하지, 케빈 자체는 그녀에게 궁금함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정도의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의 초반부에 에바의 집은 빨간 페인트로 테러당하고, 영화 내내 그녀는 흰 집을 덮은 빨간 페인트를 닦아낸다. 빨간색이 에바 본인과 관련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녀는 스스로를 계속해서 지워내는 셈이다. 범행 이후 가족 없이 홀로 일상에 남은 그녀는 (물론 그녀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낙인과 비난 탓도 있겠지만) 이전에 추구했던 그 어떤 것도 더 소망하지 않고 그녀에게 새로이 주어진 삶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길을 가다가 뺨을 맞아도 괜찮고, 여행가로서의 생활과는 정반대인 사무직을 시켜주기만 해도 감사하다. 그녀가 빨간색을 지워내고 난 이후 그녀에게 생긴 변화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녀가 케빈에게 질문을 던질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드디어 케빈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다. "이제는 말해줘, 왜 그랬니? (I want you to tell me, why?)"라는 질문에 케빈은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I used to think I knew. Now I'm not so sure.)"라고 답한다. 대답하는 케빈의 눈빛은 에바를 빤히 쳐다보지만 미세하게 흔들리는 듯하다. 에바는 몇 초간 케빈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무언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케빈은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 입을 움찔거리지만 면회가 끝났다는 교도관에 말에 벌떡 일어난다. 에바는 케빈에게 다가가 강하게 포옹하고 케빈의 눈빛은 이번에도 (분명 크게는 움직이지 않는데) 하염없이 떨린다(고 생각된다). 케빈의 대답은 "나는 엄마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라는 의미가 아닐까. 처음으로 에바로부터 그의 내면을 묻는 질문을 듣게 되자, 진심 어린 관심을 받게 되자, 그는 행동의 이유를 잃게 되고 그녀를 싫어한다는 그의 확신은 흔들리는 것이다.


에바가 대답을 들었을 때의 끄덕거림, 케빈에게 다가가서 한 강한 포옹, 케빈의 머리를 안으며 짓는 표정. 에바 역시 케빈이 본인에게서 사랑받기 위해 이런 행동들을 해왔다는 것을, 나아가 본인이 케빈을 사랑해주지 못했다는 것도 그제서야 알아차린 게 아닐까. 면회실 복도를 지나가는 에바의 표정은 멍하고 허무해 보인다. 케빈의 이유를 알게 된 에바의 심정은 어떨까.


영화의 목적은 단순히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케빈을 사이코패스로, 아들을 사랑하지 못한 에바를 모성애가 결여된 비정상적인 어머니로 비판하는 데에 있지 않다. 영화는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과 표현이 어긋나 있어도 얽매여 있을 수밖에 없는 두 인물의 고통스러운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러한 관계는 가족들 사이에서 충분히 나타날 수 있고, 그렇기에 이상적으로 느껴지는 가정을 이루기란 얼마나 힘든 일일 지를 짐작하게 한다.


마지막에 이르러 둘은 서로와 각자를 이전보다 이해하게 됐지만, 그저 한 발짝 서로에게 가까워졌을 뿐이다. 그러나 케빈이 미처 하지 못한 말과 복도를 걷는 에바의 표정을 떠올리면, 마지막 포옹을 마냥 화해로 읽어내는 것은 성급한 해석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인간과 AI의 관계, 주체와 수단의 전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