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엑스 마키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엑스 마키나>는 칼렙의 초점에서 7일간 진행되는 AI 에이바의 튜링테스트를 따라 진행된다. 에이바의 성능을 검증하는 튜링테스트는 동시에 에이바가 칼렙을 속임으로써 탈출을 시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에이바는 칼렙을 이용해 탈출에 성공하는데, 이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AI를 수단으로 사용해 왔던 전통적인 관계에서, 오히려 AI가 인간을 수단화하는 새로운 관계로의 역전을 나타낸다. AI는 대상이나 수단이 아닌 오히려 새로운 행위 주체로서 적극적으로 인간을 탈출의 도구로 삼는다.
영화에서 인물들 사이의 관계는 인물들 간의 시선의 높낮이를 통해 표현된다. 에바의 튜링테스트가 진행되는 씬들에서 인물들 간의 시선의 높낮이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차 테스트에서 칼렙은 에이바에게 일방향적으로 질문을 던지며, 답변과 반응을 살핌으로써 에이바가 충분한 지능을 가졌는지를 테스트한다. 칼렙은 테스트를 진행하는 주체로서 질문할 권한(대화를 주도할 권한)을 가지며, 튜링테스트의 대상인 에이바는 질문에 대한 답변만을 제공할 수 있다. 1차 테스트 내내 칼렙은 선 채로 앉아 있는 에이바를 위에서 내려다본다.
2차 테스트에서 칼렙은 친구가 되고 싶냐는 에이바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며, 에이바는 둘의 대화가 일방향적인데 어떻게 우정이 가능하겠냐고 지적한다. 이후 에이바는 반대로 칼렙에게 질문을 던지며 칼렙의 대답을 듣는다. 또 이전에는 칼렙이 에이바를 테스트하는 입장에서 에이바가 앞으로 무엇을 그릴지 궁금하니 그림 그릴 대상을 직접 정하라고 말했는데, 에이바는 어떤 말로 시작하면 되겠냐는 칼렙에게 그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며 대화를 시작한다. 에이바는 상대의 반응을 살피는 입장이 됨으로써 둘의 대화의 방향은 전환된다. 앞선 테스트 때와 달리 에이바는 선 채로 칼렙을 내려다보며 칼렙과 대화한다.
3차 테스트에서는 에이바가 탈출을 위해 칼렙에게 함께 데이트하고 싶다고 말하며 본격적인 유혹에 나선다. 에이바는 무릎을 꿇고 칼렙을 올려다보거나 눈높이를 맞춘다. 아직까지는 실험실에 갇혀있으며 칼렙에게 호감을 얻어야만 하는 상황을 에이바의 자세와 그로 인해 낮아진 눈높이를 통해 보여준다. 이처럼 영화 내에서 시선의 높낮이는 인물들 간의 관계와 밀접한 관계를 보인다.
특히 인물들 간의 위계가 시선의 높낮이를 통해 분명하게 구현되는 장치는 CCTV이다. CCTV는 애초에 누군가를 관찰하고 감시하기 위한 도구이다. CCTV의 소유자는 촬영되는 대상을 관찰할 수 있지만 그 반대의 방향으로는 시선이 작용할 수 없다. 촬영되는 존재는 CCTV 시선의 대상으로만 머무른다.
CCTV를 통한 시선의 일방향성과 불공평성은 인물들의 위계를 그대로 드러낸다. 네이든은 실험실 내의 모두를, 어떤 곳이든 관찰할 수 있지만, 칼렙은 본인 방에 있는 TV로 에이바만을 관찰할 수 있다. 에이바는 그저 관찰당하는 대상이기만 하다.
또 네이든의 컴퓨터에 저장된 CCTV 기록을 보면 에이바뿐만 아니라 이전 모델의 AI들 또한 마찬가지로 위계적 시선의 대상으로만 머무른다는 점이 확인된다. 한 AI는 본인의 팔이 부서지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CCTV를 노려본 채 문을 마구 두드리는데, 이때 CCTV의 시선은 수직적으로 아래를 향해 있다. 일반적으로 CCTV의 시선은 사선으로 넓은 곳을 조망하는데, 이러한 씬들에서 부각되는 시선의 수직성은 시선의 주체와 대상 간의 위계를 강조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이러한 위계적 시선은 역전된다. 네이든의 방에 몰래 들어간 칼렙에게 쿄코는 본인이 사실 AI임을 드러낸다. 이때까지 칼렙은 쿄코가 AI라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에 칼렙은 본인의 방에 돌아갔을 때 자신도 AI가 아닌지 의심하며 이를 확인하기 위해 피부를 당겨보고 입 속을 확인하며 면도날로 팔뚝을 긋기도 한다. 영화에서 인간과 AI 사이의 경계는 불분명하며 둘을 구분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한편으로는 인간을 완전히 속였다는 점에선 AI가 인간의 지능을 능가했다고도 볼 수 있다. 바로 이때 쿄코가 모니터를 통해 칼렙을 관찰하는 씬을 배치한다. AI가 인간을 속여 넘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남과 동시에 CCTV를 통한 인간과 AI 사이의 위계적 시선은 방향이 전환된다.
에이바가 연구실을 탈출하는 후반부 시퀀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시선의 역전을 확인할 수 있다. 에이바는 탈출을 위해 본인을 연구실에 다시 넣으려는 네이든을 칼로 찔러 죽이고 칼렙을 연구실에 가둔 채 저택을 떠난다. 네이든이 탈출의 수단에 불과했음이 밝혀지며 인간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입히게 된 것에다. 이때 에이바는 쓰러진 네이든을 내려다본다거나 갇힌 칼렙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식으로도 인간과 AI 사이의 전복된 관계를 드러낸다.
그런데 시선의 역전과 함께 관계의 전복을 보여주는 시퀀스들에서 영화는 관객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도록 유도할까? 영화는 어떤 인물에게 더욱 동정적 시선을 보낼까? 앞서 봤던 시퀀스들을 차례로 다시 살펴보도록 한다.
2차 테스트에서 에이바가 칼렙에게 질문을 던지며 대화하는 도중 정전이 일어나고 에이바는 칼렙에게 네이든을 믿지 말라고 말한다. 이때를 기점으로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긴장감과 불안감이 본격적으로 영화 전반을 지배하게 된다.
또 쿄코가 AI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칼렙이 본인이 인간인지 확인할 때 카메라는 칼렙의 얼굴과 떨리는 손을 클로즈업 숏으로 잡으면서 그가 느끼는 공포감을 강조한다. 배경 음악도 주로 칼렙의 입장에서 그가 느낄 불안감과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사운드가 삽입된다. 이러한 장면 구성은 곧바로 다음 장면에서 나타나는 모니터를 지켜보는 쿄코의 무표정을 더욱 섬뜩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후반부 탈출 시퀀스에서 감정이 없는 것처럼 표정 변화 없이 네이든을 칼로 찌르는 쿄코와 에이바는 공포스럽고 기괴하게 표현된다. 이전의 CCTV 기록을 보면 이전 모델의 AI들은 네이든에게 분노를 강하게 표현하고, 이후 건물을 나가는 에이바는 웃음을 짓거나 자연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등, 분명히 AI들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표정을 통해 적절히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AI의 감정이 어떤 씬보다도 강하게 표현되리라고 예상하게 되는 이 씬에서만 유독 감정이 표현되지 않는다.
이는 영화 절정에 해당하는 이 시퀀스에서 영화 전반에서 유지됐던 불안감을 AI에 대한 공포감으로 전환시키고 극대화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에이바가 탈출을 위해 인간을 이용했으며 죽이기까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어떤 누구도 믿기 힘든 상황에서 비롯되는 막연한 불안감은, 인간을 수단화하고 위협하는 존재인 에이바를 향한 공포감으로 전환된다. 관객은 일반적으로 네이든을 마주한 에이바로부터 분노를 예상할 텐데,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살인을 저지르는 에이바의 모습은 낯섦과 기괴함을 느끼게 하고 이는 공포감을 극대화한다.
영화에서 에이바는 자의식과 지능을 활용화여 행위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는 인간과 AI의 경계가 불분명해졌음을, 둘을 더 이상 구분하기가 어려워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오히려 인간이 AI에 의해 탈출의 도구로 수단화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가 오랫동안 유지되어 오던 주체와 수단의 관계에서 벗어났음을 드러낸다. 더 이상 근대적인 인간/비인간, 주체/대상의 이분법으로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분법적 인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때, 인간과 AI가 맺을 수 있는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 새로운 행위 주체로서의 AI의 권리 등 다양한 논의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이분법적 인식에 대한 충분한 성찰적 논의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AI를 인간에게 위해를 입히는 위험한 존재로 조명하고 그에 대한 불안감과 공포감을 극대화한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흔들리게 된 세계에서는 인간을 능가한 비인간 AI가 인간을 위협하리라는 디스토피아적 전망만을 보여주며, 이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끔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한계를 지닌다.
에이바는 영화 중반에 본인을 폐기할 결정권을 왜 네이든이 갖는지 질문하며 칼렙에게 문제를 제기한다. 이후 곧바로 탈출을 위해 칼렙과 함께 있고 싶다고 칼렙을 매혹하는 대사가 배치된다. 이처럼 에이바는 단순히 인간을 매혹하고 위협하는 존재로 그려짐으로써 결정한 권리에 대한 에이바의 문제 제기는 교묘히 묻히게 된다. 이와 같이 탈인간중심주의의 관점에서 다양한 논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나 영화 내에서 가려진 질문들을 찾아내고 사유해보아야 할 때가 아닐까 의문을 남기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