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시골에서 살다가 성인이 되어 서울에 입성했다. 내가 뻗을 수 있는 세상은 서울만으로도 충분히 넓고 놀라웠다. 거리를 거니는 것만으로도 눈이 번쩍 뜨이고 매 순간이 행복으로 물들 만큼 황홀했다. 그야말로 시골 촌뜨기인 나에게 실로 놀라운 세상이었다. 나는 실제로 "와, 내가 서울에 살고 있다니!" 경이로운 감탄을 뱉어내며 이게 꿈인가 싶어 눈을 비비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엄마는 갑자기 이런 말을 한다."이번 여름방학 때 동생이랑 유럽 갔다 와" 스물두 살, 여름방학을 앞둔 시점이었다. 꿈꿀 수 있는 세계는 서울로도 충분했던지라 그 말이 반갑지 않았다. 얼마나 값지고 좋은 기회인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고 하는 게 맞을 거다. 조금은 거대하기도 했고 버거웠다. 머나먼 유럽을 한 달이나 넘게 다녀오라는 제안은 갑자기 생겨난 방학 숙제 같기도 했다.
얼마나 분에 넘치는 기회인지 미처 알지 못한 채로 그렇게 유럽 땅을 밟게 된다. 준비하고 일정을 짜는 일도 꼭 수업 과제를 해내는 기분이었다. 유럽은커녕 국내 여행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던지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포털사이트에 국내 1위 여행사를 검색하고 유럽 배낭여행 상품을 몇 가지 훑어보았다. 여행사 상품을 참고하여 첫 번째와 마지막 여행지를 골랐고, 수업을 마친 후 교내 여행사로 곧장 달려갔다. 지금처럼 여러 사이트에 티켓을 검색하고 가격을 비교하는 과정 따위는 없었다.
마치 한때 유행하던 '플렉스'느낌으로 덜컥 150만 원짜리 티켓을 샀다. 심지어 대한항공 직항이었다. 이후로도 유레일 패스며 숙소 예약이며 도시 간 일정 분배와 같은 세세한 여행 준비를 성실하게 해냈다. 간혹 '이렇게까지 힘들게 여행을 가야 하나?' 볼멘소리를 늘어놓기도 하면서. 마치 원빈의 '내 얼굴 잘생겼는지 모르겠다' 같은 망언을 뱉어낸 꼴이었다.
내 평생 최고인 줄 알았던 서울을 떠나 누볐던 유럽의 풍경은 신선했고 그래서 충격적이었다. 도시마다 특색있던 건물과 이질적인 분위기덕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보행자에게 양보해 주는 런던의 횡단보도, 배스킨라빈스보다 훨씬 맛있는 이탈리아의 젤라또, 한계 없이 달려도 되는 독일의 아우토반, 거리 곳곳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던 예술가들. 한국에서는 전혀 볼 수 없던 많은 풍경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여행지였던 파리에서의 기억이 가장 신선한 충격으로 남았다. 지금 되돌아 생각해보면 별것도 아니다. 그저 파리의 어느 공원을 거닐 때 봤던 현지인의 모습일 뿐이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면서 누군가는 누워서 누군가는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는 파리지앵으로 가득찬 공원 풍경이 그렇게 신선할 수가 없었다.
내리쬐는 햇살을 조명 삼아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책을 읽던 사람들.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순간이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카메라 플래시 불빛에 놀라 눈을 감고 뜨고 반복해 봐도 까만점이 남아있는 것처럼 그 풍경은 내 마음에 잔상을 남겼다. 너도나도 앞다투어 스펙을 쌓으려 애쓰고 취업에 전부를 거는 한국의 고단함을 씻겨주어서다. 파리의 실체는 역시 마찬가지로 피곤하고 경쟁이 피 튀기는 힘든 날의 연속일지 모르지만, 여행자의 한계이면서 동시에 매력요소가 바로 단편성 아니겠는가. 뇌리에 박힌 한 장면을 멋대로 편집해서 파리는 여유 그 자체인 도시라고 마음에 새겼다.
기억 속에 저장된 그때의 여유 넘치는 장면은 간간이 내 인생에 끼어들어 삶의 자세를 고치게끔 해주었다. 나는 왕왕 감당이 되지 않는 일을 버티려 애쓰기보다는 그냥 포기해버렸다. '남들도 열심히 버티니까 나도 버텨야지. 넌 왜이렇게 나약해' 라는 말로 질책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뭐든 쉽게 포기하는 사람을 비판하는 사회의 시선에 기죽을때면 파리의 공원 풍경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러면 이내 '그래, 화려한 성공으로 둘러싸인 것도 좋겠지만 공원에 앉아 책 읽는 게 행복한 사람도 있는거야' 열정이 부족한 나도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었다. 엄마가 손에 쥐어준 유럽행 티켓은 두고두고 지울 수 없는 풍경 하나를 나에게 심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