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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Jul 31. 2023

알면서도 또 떠나는 이유


크로아티아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유럽 배낭여행을 두 번이나 다녀오고 나서다. 그마저도 스스로 발굴한 것이 아니라 친구가 보여준 사진 한 장 덕택으로 알았다. 유럽은 넓고 넓어서 장장 한 달간의 배낭여행을 하더라도 모든 국가를 다 섭렵하기는 어렵다. 굵직한 국가 위주로 여행하다 보니 사실 크로아티아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몰랐었다.


배낭여행에서 만났던 친구가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더니 귀한 보물을 보여주듯 사진 한 장을 건넸다.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여행지라며 다음 여행 때는 꼭 이곳을 방문해 보겠다고 했다. 왜 그렇게 조심조심 꺼냈는지 알 수 있었다. 사진 속 풍경은 눈이 커질 만큼 아름다웠는데,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빽빽하게 나무들이 들어서 있고 그사이 사이로 폭포수가 흐르고 있었다. 물줄기는 계곡을 따라 주르르 흘렀고 하류에는 수영을 즐기는 관광객들이 보였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자연이 만들어 낸 환상적인 수영장 풍경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친구보다 내가 더 빨리 크로아티아 여행을 가게 된다. 여행을 앞두고 그림처럼 아름다웠던 수영장을 곧바로 떠올렸다. '크로아티아 수영장'으로 검색했더니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사진 속 동화 같던 그곳의 이름은 '크르카 국립공원'이었다.


자그레브, 플리트비체, 두브로브니크와 같은 도시 곳곳을 지나 수영장에 가는 날, 다행히 날씨가 좋았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중간중간 직원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위치를 체크했다.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물어물어 근처에 다다랐는데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혹시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서 재차 물었지만 '여기'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다.


이렇게는 도저히 못 찾겠다 싶어서 이 앞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게 뭐 어렵냐는 표정으로 우리를 앞장선 직원이 겨우 몇 발짝 가더니 멈추어 선다. 바로 여기야.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눈을 돌렸다가 차마 믿기 어려운 광경을 마주하고 만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경관이 꿈에 그리던 사진 속의 그 수영장이 정녕 맞는가. 파란 하늘도 예쁜 물줄기도 거기다 수영을 즐기는 관광객도 없는데. 대체 이 현실은 다 뭐란 말인가.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기대를 잔뜩 품었다가 사진과 다른 풍경에 실망하고 발길을 돌린 경험은 왕왕 있었다. 그건 아마도 예쁘게 가공된 사진이나 영상으로 여행지를 먼저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환상을 한 겹 씌운 사진, 영상, 타인의 시선을 통하면 기대가 부풀려지기 마련이니까. 실망의 순간을 마주할 때면 풍경이 나를 약 올리며 꼭 이렇게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니가 꿈꾸던 환상은 여기에 없어."


지극히 실재적인 인생의 속성은 여기에 있다. '계획한 대로 완벽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잠시 현실을 벗어나고자 여행지라는 환상에 나를 내맡긴다고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현실을 잊고자 떠나는 게 여행이라지만, 여행지에서마저 완벽하게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게 여행의 성질이다. 하긴, 여행도 결국은 인생의 한 페이지인 건 맞으니까.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그 사실을 더 절감할 뿐이었다. 애초에 내 인생에서 바라던 대로 흘러간 게 뭐 하나라도 있던가. 여행할 때만 원하는 대로 척척 인생이 풀리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할 일이다.


그러니 이제 꿈을 깨. 그렇지만 이미 충분히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기어코 또 떠나고야 마는 인간이라는 게 아이러니다. 반복되는 실망과 기대를 무너뜨리는 현실을 끊임없이 마주하더라도 기어코 새로운 기대감이 또 솟아나고야 만다. 이미 결말을 다 알고서도 계속 보게 되는 영화처럼. 여행의 속성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자꾸 떠나고 싶을 뿐이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이만큼이나 컸다.

크로아티아 폭포 수영장 [왼쪽 사진 출처=플리커 사이트 / 사진작가 sergiu bacioi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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