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자연스레 짐 줄이기를 해야 했다. 퇴직 전, 몇개월 남은 육아 휴직에 들어갔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해하다 '정리수납사 자격 과정'을 신청했다.
강사가 내주는 숙제를 하나 씩 하다보니 집안 곳곳 물건들이 제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쓸모없는 건 버리거나 재활용 센터로 향했다. 아이들 전집과 작아진 옷 무더기를무게를 재서 돈 받고 팔 수 있다는 것도 난생 처음 알게됐다.
한 주는 주방, 다음은 아이들 옷장 한 칸, 베란다와 안방, 냉장고 등 하나씩 비워갔다. 버린다고 버렸는데도 매번 버릴 게 나오고, 쓰레기봉투가 차는 게 마치 마술같았다.
'집주인이 물건인가요? 사람인가요?'
첫 수업에서 강사가 한 말이다. 지금도 집에 짐이 쌓이는 것 같을 때면 그 말이 떠오른다.
이사의 장점은 집안 살림을 대대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관계까지도 정리가 된다. 그동안 예의상 머문 단톡방들을 이사라는 핑계로 정리했다. 더불어, 함께 있을 땐 둘도 없는 사이인 줄 았았던 이들과 사는 곳이 달라지니 멀어져갔다. 우리의관계는 거기까지였구나 싶다.
산책하기 좋은 날
내가 사는 곳은 '섬'이다.
그러나서울 방면으로 향하는 영종대교와 그 외 지역으로 가는 인천대교와 연결된 탓에 '섬'이 '섬'같지는 않다. 인천공항이 있어 서울역까지 1시간이면 닿고 각 지방을 오가는 리무진까지 있어 편리하다.
인천공항은 해외로 나가는 첫 관문이라 생각만으로도 설레는 곳이다. 천안에서 여행을 가기 위해 올라오다 인천대교가 보이면 어찌나 들뜨고 설레던지. 그런 곳에 산다는 게, 내 집이 있다는 것이 꽤 오래 믿기지 않았다.
이사 후 2년까지 안방과 거실, 주방에서 고개만 들면 바다가 보였다. 토요일 저녁 9시면 10분간 인천항에서 월미도로 중국여행객을 태운 여객기에서 불꽃놀이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은거대 자금이 이곳 섬까지 뻗어있어 아파트들과 높은 건물들이 가득하다. 10분 걸어가면 바다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생각할 뿐이다.
천안에서부터 내가 주로 한 취미생활은 자전거 타기였다. 주말이면 남편과 둘이 근처 아산까지 자전거 페달을 휙휙 밟으며 달렸다. 충무공 이순신 행사가 진행되는 충남 아산은 가을이면 은행나무길로도 유명하다. 자전거 타고 은행나무길 한 바퀴 돌고, 밥 먹고, 근처 구경을 했다. 바람에 실린 낙엽내음 맡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들었던 가수 김필의 <청춘>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이곳 영종도는 자전거 도로가 잘 갖춰져있어 편리하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식은 여름 저녁, 서둘러 밥을 먹고 다섯 식구 자전거를 타고 해안가 공원을 한 바퀴 도는 게 일상이었다. 가을엔 분홍과 하얀, 진분홍 빛 코스모스가 끝없이 펼쳐진 공원도자주 갔다. 인천공항 1 터미널 근처로 코스모스 밭을 배경으로 착륙하는 비행기를 손으로 잡는 것 같은 사진 찍는 게 유행이기도 했다.
인천공항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이곳 저곳 둘러보다 마땅한 곳이 나와 지원했는데, 다행히 성공해 2년간 공항 직원 식당을 이용할 수 있었다. 대학생 때 백화점 아르바이트를 빼곤 정식으로 서비스 직은 처음이었으나 사무실 보다 백배 천배 마음은 신나고 편했다.
비행기 잡기 놀이
걷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를 맺고 재구성하는 행위다.
자전거 다음으론 걷기에 빠졌었다. 특히, 작가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을 읽으며 유독 섬 이곳저곳을 많이 거닐었다. 페달 굴리며 달리는 것과 다른 느린 세상이 가진 매력이 있었다. 조금 걷다 해당화에 눈길 주고, 조금 더 걷다 하늘에 시선을 두는 여유가 마음을 편하게 한다.
봄
섬의 봄은 느리게 찾아든다. 다른 지역에선 이미 목련 꽃 지고 벚꽃 만개했다고 할 때 이곳은 하얀 목련 봉우리가 입을 열 준비를 할 정도다. 옆 동네 벚꽃 잎 우수수 다 떨어지고 초록 잎을 피운지 한참 지나서야 분홍빛으로 섬은 물든다.
집 근처 나루터
가을
청명한 하늘과 울긋불긋 물든 단풍으로 어느 곳, 어느 날이나 가을이 최고련만 섬 가을도 만만치 않다. 푸르른 하늘빛을 그대로 반사한 바다는 자신을 봐달라는 듯 영롱한 빛을 발산한다. 가을바람맞으며 차분히 걷는 시간을 즐기기 최적이다. 바다의 고요함과 단풍의 화려함이 어우러진 섬의 가을은 육지보다 더 짧기에 매일 밖으로 나가 온전히 느껴야한다.
인천대교 건너 집으로 향하는 길
여름
섬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계절은 여름이다. 30분 차로 달리면 을왕리 해수욕장에 도착이다. 아이들은 놀이터보다 더 자주 여름 바다를 찾는다.모래놀이와 수영을 실컷 즐긴다. 그 덕에 아이들의 하얀 피부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태양에 그을리고, 섬은 늘 활기로 가득찬다. 바다의 파도 소리와 아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즐거운 에너지를 내뿜는다. 붉게 물든 저녁노을 아래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을 즐기는 시간을 대신할게 무엇일까? 섬의 여름은 웃음 소리와 소소한 즐거움이가득하다.
을왕리 해변
여름의 섬
겨울
추위 잘 타는 나는 섬이 싫고, 더위 잘 타는 남편은 좋은 겨울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한다. 차가운 바람과 조용한 섬의 일상은 한껏 느려진다. 따뜻한 차 한잔 마시고 한층 깊고 무거워진 바다를 즐기는 매력이 있다지만, 시리고 추운 날씨가 견디기 힘들어 만사 귀찮아 겨울 잠에 빠지기 쉽상이다.
집에서 바다까지 걸어서 10분.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책 읽고, 글 쓰고, 걷는다. 하늘과 바다보며 수많은 질문과 생각에 멈춰 서게 된다. 삶의 깊이를 더해주는 공간으로서의 섬. 어쩌다, 섬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