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는 작은 고모네가 있었다. 집은 경주의 시외버스터미널 근처의 주택가에 있었다. 터미널을 건너 좀 더 나가면 강도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강은 신라 천년 고도의 성립에 큰 역할을 한 형산강이었다. 택지조성지였는지, 아직 바람 불면 흙먼지가 날리는 비포장길이었지만 길들은 반듯하게 나 있었다. 집 주변에는 공터가 많았고 공터에는 마른 잡초들이 우거지고 텃밭의 흔적이 있었으며 더러는 쓰레기들도 쌓여 있었다. 전반적으로 동네는 한적한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 시골 분위기의 동네는 아니고 양옥집들이 꽤 들어서 있었다.
아마 국민학교(그 당시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 불렀다) 4학년 겨울방학 때인가 보다. 내가 누구와 함께 경주에 가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똑똑한 아이였지만 혼자 갔을 리는 만무하고 할머니가 데려다줬을까? 엄마가 데려다줬을까? 아니면 고모가 데리고 왔을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버지가 데려다줬을 리는 없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걸 어린 나였지만 느끼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심심한 겨울 방학 내내 고종 사촌 형이랑 동생과 재밌게 지낼 수 있어서 한편으로는 좋았다. 형은 네 살인가 위였고 장난기 많고 만화책 좋아하고 놀기 좋아했고 골목에서도 대장 노릇을 잘했다. 그런 형이 좋았고 형도 나에게 잘 대해주었다. 고모 몰래 만화방에서 빌려온 만화책을 어디에 숨겼는지 나에게 알려주기도 했으니 좋아하지 않을 수 없지 않나. 하지만 그걸 입이 싼 내가 고종사촌 누나(두 살 많다)에게 말해버려서 고모까지 알게 된 건 큰 실수 중에 하나였다. 지금도 땅을 치고 후회한다. 그래도 형은 나에게 뭐라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더 좋아하게 되었다. 동생은 나보다 세 살 아래였지만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코흘리개였다. 국민학생 나이에 세 살 차이면 하늘과 땅이다. 고집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 어린 게 소리 지르는 것도 크고 잘 삐치기도 했다. 삐진 모습이 미워 보이지 않고 재밌었다. 무려 일곱 살이나 많은 자기 형에게는 그랬지만 나에게는 그나마 그러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른다.
경주에서 나는 특별한 일 없이 놀았다. 가끔 방학 숙제도 했고 동네에서 새로운 애들과 어울리기도 했고 진눈깨비 날리는 날 멀리 형산강 강둑에서 달리기 시합도 하고 얼어붙은 강에 돌도 던지고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우리 집은 아니었지만 큰 불편 없이 지냈다. 그러나 무언가 마음속에 무거운 돌 하나가 없어지지 않고 있었다. 어린 나로서는 그 돌이 무언지 그게 돌이었는지도 모르는 처지라 물어보지도 않았고 고모와 고모부 두 분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잊고 지냈다.
고모의 집은 다섯 식구가 사는 아담한 단층 양옥이었고 골목 안에 있었다. 큰 방과 작은 방, 햇살이 잘 드는 부엌에 딸린 방이 있었고 부엌은 요즘 양옥과 달리 바깥에 있었다. 한옥같이 집의 끝에 붙어 있었고 부엌방으로 문이 나 있었다. 식사를 할 때면 우린 부엌에서 주는 반찬과 밥들을 그 문을 통해 부엌방으로 날랐고 상 위에 놓았다. 양념하지 않은 김을 통째로 연탄에 구워주는 걸 각자 한 장씩 배당을 받고 찢어서 참기름 띄운 간장에 찍어 밥에 싸 먹는 그 맛은 아직 잊을 수 없다. 넓지는 않았지만 작은 화단 같은 정원도 있었다. 대문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길은 좁게 있었고 마당의 대부분은 정원이었다. 내가 있는 동안은 겨울이었기 때문에 잎이 우거진 모습은 보지 못했다. 아마 봄이었으면 꽃도 피는 예쁜 정원이었으리라. 무엇보다 정원에 올라서면 정원을 끼고 낮은 담을 경계로 옆집의 정원이 보였고 거기에는 나와 동갑으로 보이는 예쁜 여자 애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여자 애들이랑 쉽게 어울리지 못했고 같이 노는 일도 없었다. 같이 놀았다가는 친구들이 놀리고 무언가 쑥스러움이 자라나곤 했는데, 그렇다고 조숙한 것도 아니었다. 옆집과 고모네는 친하게 지냈고 자주는 아니었지만 서로 내왕이 있었기 때문에 그 여자애랑도 만날 기회가 가끔 있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희고 보드랍고 솜털이 자라 있는 얼굴과 팔. 내가 좋아했나 보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좋아했나 보다. 꿈에서도 보였으니. 하지만 그게 다였다.
햇살 가득한 부엌방은 가끔 고모와 이웃 아주머니들의 사랑방이 되기도 했다. 좁은 방이었지만 차도 마시고 다과도 먹고 수다도 떨고 하는 공간으로 손색이 없었다. 할 일 없었던 나는 그분들에게 고모의 사랑스러운 조카로 소개되었고 한 동안 품평을 받게 되었다. 인물이 훤하네, 똑똑하게 생겼다 등등. 거기에 공부도 잘한다는 고모의 말까지 추가되고. 하기야 그런 면에서 기죽지 않는 정도였고 한두 번 듣는 말이 아닌지라 별 쑥스럼없이 있다가 누군가 입이 아주 작네 라는 말을 하는 순간 내가 말했다. 코가 커서 입이 작아 보이는 거라고. 그 순간 방안 가득 폭소가 터지고 한동안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 말이 그렇게 웃기는 얘기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고모는 그 이후에도 그 말이 재밌는지 대학생이 된 나에게도 그때를 회상하며 말하곤 했다. 내 입이 작긴 작다. 코의 폭보다 작긴 하니까. 그래도 못 먹는 거 없고 할 말도 다한다.
고모부는 한편으로는 아버지랑 많이 비교되는 분이시다. 애를 키우고 가정을 돌보는 데 있어 나의 미래에 참고가 되는 면들을 많이 보여주셨다. 중학교 교사가 직업이어서 그렇다고는 볼 수 없다. 아버지와는 반대로 항상 친절하고 애들에게 재밌게 대해 주고 고모에게도 다정했다. 밤에는 레슬링 대회가 많이 열렸다. 제일 큰 방에 이불을 두껍게 깔고 각종 기술을 걸어가며 하는 레슬링은 그야말로 긴 겨울밤에 흥미로운 이벤트였다. 당시 박치기로 유명한 김일 선수는 우리들에게 요즘의 히어로 못지않은 인기를 구가하는 선수였다. 동생과 나의 일대일 매치나 동생과 나 그리고 형과의 이대일 매치도 흥미진진한 경기였다. 가끔 삐진 동생이 분위기를 끊기도 했지만 금방 회복되었다. 이 경기의 심판은 항상 고모부였다. 죽은 분위기도 고모부가 다시 살리고 띄우셨다. 이런 분위기는 우리 집에서는 없다. 아버지가 무섭거나 무뚝뚝한 분은 아니셨지만 이 정도는 경험해보지 못했다. 훗날 나의 애들이 자기들의 눈높이에서 같이 놀려고 노력하는 아빠를 보게 되는 것은 아마 고모부의 역할이 기여한바 컸을 것이다.
경주가 옛 신라의 수도였다는 건 알았지만 그 많은 유적지나 고분, 박물관, 첨성대 등지에 놀러 다니진 않았다. 한 번쯤 갔으면 좋았겠지만 방학 내내 바깥나들이는 별로 하지 않았다. 왜 다들 그러지 않나. 집 앞에 아무리 좋은 곳이 있어도 잘 안 간다고. 한 번은 고모랑 고종사촌 형, 누나, 동생이랑 시장에 갔다. 고모가 옷을 사주셨다. 속옷도 사주셨고 티셔츠도 사주셨다. 옷은 마음에 들었으나 똑같은 모양의 옷을 동생에게도 사준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전날 밤 나는 정말 오랜만에 이불에 지도를 그렸다. 그래서 속옷도 필요했고. 어린 마음에 어쩌지 못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렇게 수치스럽지 않은 건 고모가 잘 대처해 줬기 때문이리라. 지금 생각하면 뭔가 불안한 것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항변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겨울방학을 거의 통째로 나 혼자 고모네에 와서 지낸다는 건 이상하다. 아무리 어린 나이지만 정확히는 몰라도 이상하다는 느낌은 있었다. 나는 내가 왜 여기 와 있느냐고 아무에게도 묻지 않았다. 언제 집에 가느냐고도 묻지 않았다. 막연히 개학할 때가 다가오면 집에 가겠지 생각할 따름이었다. 형이나 누나 동생들은 알았을까? 방학 내내 그런 낌새는 느끼지 못했다. 내가 둔해서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 긴 방학 내내 놀러 와 있다는 건 그들도 이상하게 여길 만하다. 예전에 방학 중에 3,4일 정도 놀러 다닌 적은 있다. 그때는 서로 하루 종일 먹고 놀고 잘 때도 놀고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잠시도 쉬지 않고 놀다가 집에 갈 때나 떠나보낼 때는 아쉬워 헤어지기 싫어했다. 헤어질 날이 정해져 있어 더 아쉬웠을까? 그래서 방학 내내 고모네에 와 있으면서 당분간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아무 생각 없이 유유자적 놀기만 했을까. 하지만 우리들이 방학을 계기로 모일 때는 큰고모네 작은 고모네 우리 집 도합 12명이나 되는 사촌들이 대다수 모여 왁자지껄하게 놀던 기억들이다. 혼자 이렇게 떨어져 있게 된 건 처음이다. 그러니 사촌들도 이상하게 생각했을 법도 한데.
고모는 2남 2녀의 형제자매 중에 막내시다. 아버지는 그중 둘째였고 누나가 한 분 계셨다. 내가 네 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작은 고모부가 교편을 잡고 있고 성실해 보이고 집안도 나무랄 데가 없어 고모와 결혼을 시켰을 것이다. 당시로는 많지 않았지만 가톨릭 집안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밥 먹을 때마다 잠시 손 모으고 배고픔을 참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고모는 행복해 보였다. 아담한 양옥집에서 아들딸 낳고 다정한 남편과 이웃들과 재밌게 지내시는 걸로 보였다.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나에게도 잘 대해 주셨다. 우리 집은 대체로 그런 분위기와는 좀 멀다. 그렇다고 침울하거나 행복하지 않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집을 떠나올 때 집안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엄마도 나에게 내색은 안 했지만 엄마와 할머니의 어두운 얼굴이 집안 구석구석에 스며 있었다. 누나들과 동생은 어떡하고 있을까. 별로 걱정은 안 되었지만 나처럼 큰 고모네에 갔을까? 큰 고모네도 여기처럼 행복한 집일까?
우리 집에서 경주까지는 당시 완행열차가 주된 교통수단이었다. 완행인지라 난 경주가 엄청 먼 곳에 있는 곳인 줄 알았다. 느려서 그렇기도 했지만 아마 굴을 10개 정도는 지나가야 도착하는 곳이어서 더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굴을 몇 개나 지나가는지 세어보는 것도 재미 중에 하나였다. 고등학생이 되어 경주까지 자전거 여행을 해보고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란 걸 알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어떻게 누구와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별일 없었던 듯이 집은 그대로 있었고 아버지도 계셨다. 경주로 갈 때처럼 집안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내 기억에 아버지도 방학 동안 집에 안 계셨던 것으로 짐작이 간다. 아무도 나에게 그런 얘기를 해주지 않았고 누구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나는 안다. 그 느낌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다. 아버지는 40대 초반의 나이에 방황하면서 엄마와 할머니의 얼굴에 그림자를 잔뜩 그려 놓았다. 어쩔 수 없이 끼어든 선거에 패배하고 결국 노름판에도 기웃거리셨다. 아니 기웃거리기만 했는지 본격적인 노름을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엄마가 소문을 듣고 판이 벌어진 여관에 찾아가기도 했다는 건 안다. 그 시기에 나는 경주로 보내졌다. 그 후 우리 가족은 다시 옛날로 돌아온 아버지와 함께 대처로 이사했다.
쓸쓸한 우리 집이 생각난다. 나의 어린 시절, 식구가 일곱이나 되었지만 휑한 느낌이 나던 집을 잊을 수가 없다. 넓은 마당과 사무실이 딸려 있는 방, 부엌과 장독대, 마당 건너 큰 창고와 지하창고 건물. 마당 전체를 열 수 있는 큰 철제 대문. 아버지의 방황은 나에게 그 집이 텅 빈 듯한 이미지를 갖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