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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옥현 Jul 19. 2021

어머니의 작은 소원

제사와 제사음식

   요즘은 제사를 지내지 않고 간단히 조상님을 추모하는 집안들이 많아졌다. 다들 뿔뿔이 흩어져 살기도 하고 생업이 바쁜 와중에 모이기도 힘들거니와 그 많은 일들이 모두 허례허식이라는 의견들도 많다. 먹고살기 힘들 때는 집안의 제사가 영양 보충을 위한 기회이기도 했지만 고도 발전의 시기에는 갑자기 잘 살게 되어 반대급부로 음식을 잔뜩 차려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제사 음식들이 모두 맛있어서 안동의 헛제삿밥처럼 상품화된 경우도 있다. 옛날 양반들이 제사 음식이 먹고 싶어 헛제사를 열어 제사 음식을 즐겼다는 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어릴 때 먹었던 제사 음식들이 그리울 때가 많다. 하지만 그 많은 음식들을 준비하고 몇 날 며칠을 고생해야 했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살아생전에 좀 더 편하게 해드렸어야 했다는 막급한 후회가 든다.

 

   집안의 장자인 아버지는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 내외와 할아버지의 기제사(忌祭祀)를 모셨다. 기제사 수일 전부터 어머니는 제사에 쓸 음식 재료들을 사고 손질하고 보관하는 데에도 신경을 썼다. 종가(宗家)는 아니었지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형제가 다섯 분이시고 그중 세 분이 아직 살아계시며 그 자손들이 대부분 가까운 곳에 살고 있어 꽤 많은 분들이 제사에 참석했다. 잠시 왔다가 제를 지내지 못하고 인사만 하고 가는 분들 포함하여 줄잡아 마흔 명은 넘었다.

 

   아버지는 3남매의 둘째였고 장손이었으며 외동아들이었다. 고모들도 같은 도시에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제사 음식 준비만 해도 새벽부터 저녁까지 쉴 틈이 없었다. 가끔 작은 할아버지네 며느리들이 도와주러 오기도 했으나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손 많이 가는 고구마전, 두부전, 연근전, 정구지(부추의 경상도 사투리) 전, 우엉전, 동태전, 동그랑땡, 소고기 꼬치구이, 산적꼬치 등 종류도 많은 전 요리, 종류만 많은 게 아니라 그 많은 사람들이 먹고 집에 갈 때 조금이라도 포장해서 들고 갈 수 있게 했으므로 양도 엄청 많았다. 특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산적꼬치는 길쭉하게 썬 소고기를 양념하고 당근, 파, 버섯 등으로 순서대로 꼬치에 끼워 밀가루 반죽 묻혀 굽고 계란 노른자와 흰자를 분리하여 양면에 발라 색이 다르게 다시 구워내는 그야말로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다. 마루에 커다란 전기 프라이팬 두 개를 놓고 연신 구워내어야 했다.

   제사 음식 중 항상 어른들이 품평을 하는 것은 돔베기(상어고기) 꼬치구이였다. 두툼하고 넓적하고 네모반듯하게 썬 돔베기 서너 개를 꼬치에 끼워 구워낸 고기는 쫄깃하고 짭짤한 맛이었는데 그 짠맛의 정도가 항상 품평에 올랐다. 작은할아버지들은 한 입 맛보시고는 이번 돔베기는 간이 아주 잘 배었네, 이 번 거는 좀 짜네 하면서 품평하셨고 비로소 우리들도 젓가락을 대고 한 점씩 맛보고는 했다. 남은 돔베기 자투리로는 어탕을 끓여내어 제사상에 올렸다.

 

   고사리, 무나물, 숙주나물, 시금치나물, 도라지는 모두 다듬고 씻어 데치거나 볶아서 참기름과 소금 또는 조선간장으로 간을 하고 깨를 뿌려 제사상에 올렸고 음복할 때 모두들 나물비빔밥을 먹었다. 국거리 소고기를 썰어 참기름으로 볶다가 나박 썰기 한 무를 넣고 같이 볶은 후 물을 넣고 간을 하고 푹 끓인다. 거무스름하게 떠오르는 거품들을 걷어내고 파를 듬뿍 넣어 끓여낸 맑은 소고기 뭇국은 그 깊고 시원한 맛이 일품이었다.

   음식 준비 도우러 오시는 분들도 손님이었기에 일손을 덜어 주기는 했으나 점심 식사도 대접해야 했고 일손을 돕지 못하는 작은 할머니들은 전 부치는 주변에 앉아서 이런저런 소리 하다가 밥을 같이 드시곤 했다. 어머니의 시어머니인 할머니가 계셔서 약간 도움이 되긴 했지만 노쇠하셔서 큰 힘은 되지 못했고 그저 지켜볼 따름이었다. 할머니는 옆에서 우리 손자가 좋아하는 산적꼬치 많이 하라고 한 마디 거들기도 했다.

 

   엄청 큰 토종닭은 한 번 삶아 낸 다음 모양을 그대로 살려 진간장과 설탕이나 물엿으로 간을 하고 계속 끼얹어 가면서 간이 배도록 약불에서 오랫동안 졸여가며 해야 하는 음식이었다. 간장 색이 짙게 밴 닭고기는 짭짤하면서 달짝지근해서 이 역시 내가 엄청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평소 구경하기 힘든 크기의 조기와 고등어를 굽고 미리 사놓은 떡과 한과를 보기 좋게 제기(祭器) 위에 쌓아 올리고, 과일들을 씻는다.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밤 치는 일을 도왔다. 밤은 미리 물에 담가 놓았다가 껍질을 벗기고 속껍질을 쳐내는데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각지고 이쁘게 쳐내는 게 기술이었다. 5촌 당숙들께서 돌아가며 가르쳐 주신 기술이었는데 처음에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밤 까고 다듬는 데만 한 시간 넘게 걸리는 작업이었다.


   이 모든 과정이 저녁답에야 끝나고 제관(祭官)들이 하나둘씩 집으로 찾아들면 어머니는 또 저녁 준비를 해야 했다. 제사 지낼 음식들 장만하면서 제사상에 올릴 음식들은 따로 빼놓고 남은 전들과 그 외 밑반찬들로 상을 차려 여러 제관들의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제관들이 한꺼번에 오는 게 아니라서 상을 여러 번 차려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모들도 저녁때나 되어야 집으로 와서 저녁을 먹었다. 하루 저녁에 밥도 여러 번 지어야 했다. 저녁을 다 마치고 나면 여러 친척들은 이 방 저 방에 모여 밀린 얘기들도 하고 잠을 자기도 하면서 제사를 기다렸다. 집이 가까운 분들은 저녁 먹고 집에 갔다가 제사 지낼 시간에 맞춰 오시기도 했다.

 

   자정을 30분 남긴 시간쯤 되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메 지으라고 이르시고 진설(陳設)하자라고 하시면 어머니는 다시 밥솥에 햅쌀로 밥을 안치고 나는 벽장에서 병풍을 꺼내고 돗자리, 제사상을 꺼낸다. 아버지가 삼베옷을 입고 삼베 두건을 쓰시는 동안, 음식들을 하나하나 제기에 담으면 상으로 옮겨 조율이시(棗栗梨柿)며 홍동백서(紅東白西)에 따라 맨 앞줄에 과일을 놓고 다음 줄은 전, 그다음 줄은 마른오징어와 명태포(脯), 소고기, 생선, 닭고기, 떡과 한과를 놓고 다음 줄에 막 지은 밥과 국, 어탕 나물을 법도에 따라 차려놓는다. 아버지는 상을 둘러보시고 잘못된 음식의 위치를 수정하셨고 밤 12시가 지나면 초를 켜고 향을 피우고 모든 제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엄숙히 제를 지낸다. 친척이 가지고 온 맑은 청주를 준비하고 모사(茅沙) 그릇에 술을 따라 강신(降神)하고 두 번 절한다. 아버지가 초헌(初獻)하고 5촌 아재(당숙)가 꿇어앉아 축문(祝文)을 읽고 어머니가 아헌(亞獻)을 한다. 가까운 친척들이 연달아 잔을 올리고 종헌(終獻)을 하면 아버지가 첨작(添酌)하고 합문(闔門)이라고 외친다. 제관들은 일제히 흩어져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문 쪽을 향하여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으고 서서 조상님이 흠향(歆饗)하실 수 있도록 기다린다. 제주(祭主)의 헛기침 소리가 들리면 문을 열고 나온다. 맑은 물에 밥을 말아 좀 더 드십사 하고 기다린 후 축관(祝官)이 서서 이성(利成)이라고, 제사가 순조롭게 끝났다고 외치면 모두들 두 번 절한다. 지방(紙榜)을 태우기까지 막상 제사 지내는 시간은 겨우 20분 남짓이다. 가끔 이 짧은 제를 위해 수일 전부터 준비하고 하루 종일 음식을 장만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제를 마치고 나면 바로 음복(飮福)을 한다. 모든 제관들이 상에 둘러앉아 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고 술도 한 잔 하게 된다. 어머니는 음복도 할 시간 없이 음식을 나누어 상으로 내고 제관들이 빈손으로 가지 않게 음식들을 따로 나누어 담는다. 아버지는 잊지 않고 수위 아저씨에게 한 접시 갖다 드리라고 한다. 이 일도 항상 내 몫이었다. 새벽 두 시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시간에 제관들은 하나둘씩 떠나고 이제 남은 것은 뒷정리, 설거지, 그리고 녹초가 된 몸이다.

 

   언젠가 어머니가 하시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여보 우리도 이제 초저녁 제사로 바꾸면 안 될까요? 아버지는 혀를 차며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는 일찍 제사를 물려받았다. 명절 차례는 큰 집부터 작은 집까지 아침 일찍부터 네 군데를 순서대로 돌아가며 지냈다. 우리 집이 제일 큰 집이어서 명절 때마다 새벽같이 일어나야 했다. 명절 차례도 마찬가지로 많은 종류의 음식을 고스란히 준비해야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야 네 군데 차례가 다 끝났는데 집집마다 음복을 하다 보니 배는 엄청 불렀다.

   60대 초반에 비교적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빠짐없이 제를 모셨고 매번 자정이 넘은 시간에 제사를 지냈다. 내가 결혼한 후에도 제사를 나에게 내리지 않고 직접 모셨다. 아버지는 고집을 꺾지 않으셨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나더러 앞으로 초저녁에 제사를 모시도록 하라고 하셨다. 당대(當代)에 고생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식에게는 힘든 것을 물려주기 싫은 게 부모의 마음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바꾸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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