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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상 Jun 22. 2021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우리

아직 피우지못한 꽃봉오리들에게

“죽기 직전에 못 먹은 밥이 생각나겠는가, 아니면 못 이룬 꿈이 생각나겠는가?”
주호민 작가의 네이버 웹툰 '무한동력' 中 13화 스틸 컷 (1화부터 15화까지 무료)


주호민 작가의 2012년에 기고된 네이버 웹툰 ‘무한동력’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대사이다.

당장 밥에만 급하게 살아온 사람은 자신의 진정한 꿈에 대해 되돌아볼 것이다.

그럼, 꿈만 좇으면서 살다가 얻은 게 없는 사람은?     


나의 학창 시절은 주말이면 동네 친구들 따라 축구하러 다니고, 끝나면 PC방에서 게임을 하면서, 짜장면 시켜 먹는 것이 행복이었다. 약속이 없으면 혼자 1시간쯤 걸리는 종점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에 있는 작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했었다. (지금은 코로나로 폐업했다) 이 이상은 바라본 적이 없었다.

나는 집 근처에 있는 인문계 고교를 졸업하여, 평범한 이과 남학생으로 무난한 이공계열 학과를 졸업하여, 기술직 공무원이 될 예정이었다. 왜냐하면 내 옆의 친구들도 그렇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 꿈이었던 내가 헛바람이 들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2학기였다. 내가 2학년인지 3학년인지 경계가 애매모호한 시점이었다.


“좋아하는 것은 취미로, 잘하는 것을 직업으로 가져라.”

교과목 수업보다 인생 수업하기를 더 좋아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라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이 일치한 직업을 삼으면 되는 것 아닌가? 18살에 처음으로 내 진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영화 감상이었고, 잘하는 것은 우연히 참가하게 된 교내 글쓰기, 편지쓰기 대회에서 우승한 것, UCC 제작 경험이 많다는 것이었다.

정작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기술직 공무원이 되기 위한 노력은 하나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이대로라면 나는 죽도 밥도 안되리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남들은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하는 시기에 무작정 현장학습 사유서를 작성하고, 학교를 일주일간 가지 않았다. 적당한 사유로 그 시기에 개최된 영화제에 방문하겠다고 작성하였다.

그렇게 영화제에서 일주일 동안 게스트하우스를 잡고, 하루 4편의 영화를 꼬박꼬박 챙겨봤다. 영화가 끝나면 게스트와의 만남이 있고, 감독, 배우 등 영화 관계자들과 관객이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담론이 오가는 현장이 너무나도 빛나 보였다. 다들 좋아하는 일에 진심이었다. 나도 여기 있는 사람들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


영화제가 끝난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나는 좋아하는 일에 이렇게 열정을 쏟아본 적이 있는지, 밤을 새워가며 무언가에 몰두해본 적이 있는지 생각하였다. 생각해보니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공부하고 스펙 쌓는다고 바쁜 시기에 무작정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도 노트북을 들고 와 과제를 핑계로 영화를 보았고,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도 숨어서 폰으로 영화를 보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영화를 밤새 보다가 잤었다. 일어나면 다시 영화를 보았다. 방문했던 영화제 외에도 국내에 개최된 수많은 영화제를 직접 찾아다니게 되었다. 영화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최대한 많이 보았다.

    

왼쪽 사진부터 제 2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영화로운 나날, 도둑들 GV',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모어 댄 블루 GV'

영화를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화에 사용된 기법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미장센이 무엇이고, 플롯 같은 단어들이 무슨 뜻인지 찾아보다 보니, 도서관에 있는 영화 관련 서적을 다 읽게 되었다. 동네 도서관은 작았기에 영화 관련 서적은 한 달쯤 되니 모두 다 읽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 잡지나 영화학을 다룬 서적을 구매해서 읽기 시작했다.


나는 주어진 공부만 평생 해오다가, 처음으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즐겁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을 찾게 되었다. 진정한 꿈을 갖게 되었다.


“영화제에 내 영화가 상영되는 것.”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땐, 나의 꿈이 확고해져 있었다. 그렇게 나는 대학에서도 영화를 배우기로 다짐하였다. 나는 이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확신하였다.


이후 대학교 1학년 재학 중, 사비를 들여 단편영화도 연출해보고, 시나리오 제작 지원 공모전에 출품도 해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영화제 봉사활동, 스태프도 지원해보았으나, 모두 실패, 낙선, 불합격이었다.

나는 잘한다고 생각했던 영화를 통해 무엇하나 제대로 성과를 낸 것이 없다.     


스스로가 자만심만 가득 차 있던 것이 부끄러워 1학년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군대에 갔다. 군대에 있으니, 동기였던 학우들은 취업도 하고, 영화제 출품도 준비하고, 영화 연출 수준도 높아지고, 배움의 차이가 벌어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스스로가 더욱 위축되고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죽기 직전에 못 먹은 밥이 생각나겠는가, 아니면 못 이룬 꿈이 생각나겠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되묻고 싶다.

“꿈만 좇으면서 살다가 얻은 게 하나 없는 나 같은 루저는 어떡해야 하나요?”


“우리는 모두 흔들리며 피는 꽃"

이룰 때까지 꿈을 향해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나는 스스로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성취한 것이 없기에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 스스로 믿고 있다.

미련해 보일 수도 있다.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에서 허우적거리는 채로 평생을 살다가 죽어버릴 수도 있다. 평생을 후회만 하다가 죽을수도 있다.

아무렴 어떠한가? 도전해보지 않고, 후회하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꿈을 위해 도전하다가 실패하더라도 딛고 한 단계 더 큰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건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우린 살아가다 보면 많은 순간에서 타협하게 된다. 환상적인 꿈은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게 된다. 그러다 보면 꿈을 놓고 가게 된다. 이를 지양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매번 실패만 겪어본 나 같은 루저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자신의 꿈에 대한 동경을 품었던 순간을 잊지 말고 꼭 간직한 채로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그것이 현실 속에서 진정한 ‘나’를 잃지 않는 방법이라고.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 中    

도종환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은 힘들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우리는 아직 피우지 못한 꽃망울이기에

오늘도 내일도 부단히 뿌리내릴 우리기에

꽃봉오리 안에서 피울 꽃을 그린다.


'흔들리며 피는 꽃'에 짧은 답시를 지어보았다.


평생 조선소에서 근무하며, 정년이 다 되어감에도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고자 공부를 멈추시지 않는

열정을 가르쳐주신 아버지.

평생 자식 뒷바라지만 하다, 쉰 넘어서 하고 싶었던 캘리그래피, 바리스타 공부를 시작하며

배움엔 나이가 없는 것을 가르쳐주신 어머니.


나의 삶에 자극과 원동력이 되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부지런히 영화 찍고, 글 쓰며 살고 싶다. 아니,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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