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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Apr 07. 2024

내일 지구가 끝나도 오늘 사랑하고 있으리(2)

명동 & 홍대. CGV & 상상씨네마. 사랑은 낙엽을 타고.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본 글은 2편으로 나눠 연재합니다. 이전 편을 읽고 오시길 바랍니다.


2. 종말과 뮤지컬 : 가능성을 현실로 만드는 노래

그렇다면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종말과 뮤지컬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뮤지컬에서 서사 그 자체인 노래는 그야말로 억압과 도약으로 가득하다. 뮤지컬의 노래는 단 몇 분 혹은 단 몇 초만에 인물의 감정과 상황을 관객들에게 이입해 인물의 변화 과정을 함께 경험하도록 한다. 그렇기에 뮤지컬의 노래는 단순히 멜로디만 있는 노래가 아니라 가사와 그에 맞춰 육체를 적극 활용하는 춤, 여기에 거대한 무대 장치들까지 동원된다. 멜로디와 박자만이 아니라 관객이 한 번에 인지하기 힘든 공연의 총체에 관객은 현실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감정의 총체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총체는 기본적으로 억압과 그에 대한 극복 즉, 도약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그리고 종말이라는 사건은 단순히 억압과 절망의 상황이 아니라 억압과 절망에 대한 극복 의지까지 포함하고 있는 사건이다. 예수의 재림이나 미륵의 출현처럼 어떤 한 순간으로서 사건이기도 하며 그 순간까지의 기나긴 인고 즉, 영원으로서 사건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순간이기도, 영원이기도 한 종말은 뮤지컬과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잘 어울리는 한쌍인 듯하다. 뮤지컬의 노래는 서사의 특정 순간에서 인물의 감정과 상황, 변화하고자 하는 목표 혹은 의지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그 노래는 아직 가능태로서 현실태인 다음 감정과 상황이 오기 전까지 인고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뮤지컬의 노래는 한 순간의 종말이기도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종말이기도 하다.

출처. 왓챠피디아

뮤지컬적 영화인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종말은 안사와 홀라파가 살고 있는 현실 자체이다. 안사와 홀라파가 살고 있는 공간, 헬싱키의 현실은 내외적으로 굉장히 절망적이다. 안사가 라디오를 켤 때면 매번 러-우 전쟁 뉴스, 특히 민간인 대량학살에 대한 뉴스가 공간을 가장 먼저 채운다. 전쟁은 헬싱키에서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고 있으나 전쟁 가해자인 러시아는 핀란드의 인접 국가이다. 그리고 핀란드는 2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바가 있다. 전쟁을 제외하더라도 헬싱키 내부도 죽음과 절망으로 가득하다. 안사가 일하는 대형 마트는 소비할 수 있는 상품으로 가득하지만 쌓이다 유통기한을 넘겨 버려질 뿐이다. 유통기한을 넘긴 상품은 상품으로서 가치가 없음에도 보안과 안전의 명목으로 함부로 가져갈 수 없다. 시민들의 모습에서도 공동체의 미래라 할 수 있는 젊은 세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은 바에서 빈 맥주잔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는 나이 든 세대이며 젊은 세대는 밤 거리를 떠돌며 소매치기나 할 뿐이다. 그렇다고 밤 거리가 떠들썩한 것도 아니다. 밤이 되면 불이 켜진 곳은 거의 없고 몇몇 바에만 음주가들이 밤 늦게 연거푸 술을 들이키며 멍하니 있을 뿐이다. 헬싱키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죽어가는 도시로서 안사와 홀라파의 현실에 종말감을 더한다.


인물의 내외적으로도 절망은 가득하다. 안사는 내적으로 외로움이 당연한 삶을 살고 있다. 안사는 골목의 외진 곳 햇살이 들어오나 싶은, 눅눅한 집에서 혼자 있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라디오를 켜지만 앞서 말했듯 라디오에서는 러-우 전쟁의 민간인 대량학살 뉴스가 먼저 나올 뿐이다. 직장이든 집이든 안사는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항상 마주해야 한다. 외적으로도 안사의 삶은 쉽지 않다. 안사는 끼니를 유통기한이 지난 마트의 식품을 훔쳐 해결해야 하고, 그조차도 상품 질이 좋지 못한 경우가 많으며, 경비원에 발각되어 마트에서 해고당하기까지 한다. 공과금을 내지 못해 두꺼비집을 내려 전기를 스스로 끊어야 했고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이용하려 한 PC 카페의 1시간 요금 중 일부만 지불해야 할 정도이다. 그가 취직한 바의 사장은 몰래 마약을 팔다 월급날 경찰에 체포되기까지 한다. 안사는 자본주의의 도시에서 생존이 위협받는 와중에도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불가능한 삶을 홀로 견디고 있다.


홀라파도 안사와 비슷하다. 어떤 의미에서 홀라파는 내외적으로 안사보다 더욱 외로움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공장의 금속공으로 일하는 홀라파는 좁디좁은 회사의 기숙사에서 살면서 주말을 앞둔 금요일에 시내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는 금주와 금연을 해야 하는 작업장에서 몰래 술을 마시고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핀다. 특히 홀라파는 술을 한시도 놓지 않는다. 작업장에서 몰래 한 잔. 바에서 취하는 것이 기분 나쁘다며 한 잔. 그냥 할 게 없어서 한 잔. 홀라파에게 술은 직장을 잃고 공사판의 일용직 근로자로도 환영받지 못하게 하지만, 첫 만남에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아니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한 이성 안사가 술꾼을 싫어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자신도 잔소리꾼은 싫다고 말하며 떠나버린다. 홀라파에게 술은 당장 죽어도 그만이라 생각하면서 오히려 외롭다고 티내는 것이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외로움 그 자체인 삶을 버티게 해주는, 자신의 마초성을 강화시켜주는 보호 요소이다. 그렇기에 홀라파는 내외적으로 외로움에 취약한 인물로서 누군가가 자신을 붙잡아주고 함께 있어주길 끊임없이 바라는 인물이다. 그의 주변에 바리톤의 목소리로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는 직장 동료가 항상 있다는 사실과 안사를 보자마자 결혼하고 싶다고 느낀 것을 보라. 야레야레, 못말리는 아저씨.

출처. 왓챠피디아

내외적으로 절망이 가득한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공간과 인물은 노래를 통해서 끊임없이 자극을 받는다. 외로움이 당연한 삶을 살고 있는 안사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외로움으로 가득한 자신의 집을 인지하면서도 끊임없이 바깥을 바라본다. 바깥도 마찬가지로 절망과 고독으로 가득하고 생명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음에도 안사는 계속해서 외부로 눈길을 준다. 그리고 스크린의 공간으로 치면 안사의 시선은 항상 스크린 좌우변의 경계와 굉장히 가깝고 그의 시선은 그곳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 순간마다 안사의 배경에는 예쁘게 차려입을 옷이나 허리띠도 없다는 노래가 나올 때건 겨울과 얼음처럼 차갑기만한 사랑 대신 따뜻한 사랑을 느끼고 싶다는 노래건 항상 노래가 들린다. 안사의 시선은 스크린의 가장 취약한 듯한 부분을 뚫을 듯이 바라보고 노래는 그런 안사의 시선을 타고 스크린을 넘어 관객에게 다가온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노래는 육체성이 넘치는 춤이나 극적인 무대 효과 대신 카메라를 통한 극적인 화면 구성과 함께 끊임없이 인물을 자극하고 상황이 변화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계속해서 관객에게 각인시킨다.


특히 노래의 자극이 가장 극적으로 보이는 순간은 홀라파가 바를 빠져나와 술을 끊게 되는 사건이다. 흰 머리의 두 젊은 여성으로 구성된 밴드가 슬픔과 환멸로 가득한 어딘가에 영영 갇혀 떠나지 못하고 있는 누군가의 시점에서 노래를 연주 중이다. 슬픔과 환멸로 가득한 그 어딘가를 빠져나간다면 그건 아마 자기 자신을 위해서일 거라는 가사가 흘러나오는 동안 바의 손님들은 멍하니 밴드의 노래를 듣고 있을 뿐이다. 밴드의 노래를 듣다 자리에 일어나 바를 나오는 사람은 홀라파만이 유일하다. 바를 빠져나온 홀라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술을 모두 버리고 술을 잊어 핼쑥해질 때까지 버틴다. 술의 유혹을 이겨내 핼쑥해진 홀라파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몸을 씻은 다음 옆 방에 있는 남자에게 가 만나야 할 여자가 있다며 정장을 빌리는 일이다. 일련의 행동과 사건에서 슬픔과 환멸로 가득한 자신의 삶에서 외로움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마초성을 자극한 술을 스스로를 위해 끊은 홀라파의 변화는 밴드의 노래 가사를 떠올리게 한다. 바를 나가는 순간 다시 바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가능태와 술을 끊을 수도 있다는 가능태 중 술을 끊을 수도 있다는 가능태를 현실태로 만든 홀라파의 모습은 종말적인 현실의 억압에 대한 극복 의지를 드러낸 도약의 순간 즉, 종말적 순간이다.


3. 종말이 다가와도 사랑이 있다면

이러한 종말적 순간이 이어지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결말부에 가서 어떤 의미에서는 뮤지컬에서 벗어나 좀 더 현실적으로 혹은 뮤지컬에서 벗어나되 좀 더 서사적으로 끝을 맺는다. 영화의 결말부 서사는, 특히 결말은 굉장히 종말적이다. 순간이면서 영원인 종말은 끝이자 시작이다. 홀라파는 안사를 만나러 가는 도중 기차에 치여 혼수상태에 빠진다. 바로 직전 찾아가도 되냐고 전화한 홀라파와 지금 당장 오라고 답하고 길에서 구조한 개에게 청소를 하자고 한 안사의 상황과 비교해 들려온 여성의 비명 소리처럼 너무나 급격한 추락이다. 이러한 추락으로 병원에서 두 사람의 모습은 홀라파가 결국 깨어날 것이라고 생각해도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으로 계속해서 종말적인 분위기를 유지한다. 이러한 종말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듯 안사는 병원을 찾아가 그런 홀라파가 깨어나길 기다리며 옆에서 말을 건다. 이 때 처음에는 잡지를 읽어주려던 안사는 고학력자의 식인 사건이라는 끔찍한 사건이 적힌 잡지를 읽다 그만두고 핀란드 축구 대표팀이 월드컵에서 우승할 것이라는, 일어났으면 좋을 이야기를 지어낸다. 슬픔과 환멸로 가득한 현실에서 희망을 피어오르게 할 스포츠 소식은 홀라파가 어서 일어나길 바라는 감정과 의지이면서도 스크린 너머 바깥에서 보기에 러-우 전쟁으로 연결된 스크린 안밖의 현실 둘 다에서 불가능한 사건이기에 안타까운 한숨과 웃음을 준다. 아직도 자고 있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자가 울고 있다고요.

출처. 왓챠피디아

물론 다행스럽게도 안사와 홀라파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홀라파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병원으로 달려간 안사는 홀라파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홀라파는 눈을 떠 꿈 속에서 혼인신고를 했다고 말한다. 의료진의 검사 끝에 퇴원해도 괜찮다는 판정받은 홀라파의 퇴원 날, 안사는 병원을 나오는 홀라파를 보고 먼저 윙크를 날린다. 홀라파는 날씨가 그렇게 맑지 않고 바람은 차가우며 떨어진 낙엽이 바람에 날려 외로워 보이는 저녁에 퇴원한다. 하지만 퇴원길 안사와 홀라파는 전혀 외롭지 않다. 함께 온 개에게 이름을 지어줬냐는 홀라파의 물음에 채플린이라고 지었다는 안사의 답에서 알 수 있듯 해가 저물고 있는 가운데 보이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떠오르게 한다. 슬픔과 환멸로 가득한, 종말과 같은 현실에서 두 사람은 꿈 속에서 혼인신고를 했다는 말에 웃고 상대방이 먼저 건네는 윙크에 웃으며 당장 지금도 외로운 현실을 견디며 살 것이다. 그들의 해피엔딩이 실제로 계속 해피엔딩은 아닐테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그리고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삶이 이어질 것 같다. 끝난 듯하지만 여전히 현실을 가득 채운 슬픔과 환멸에 아마도 사랑으로 피어나는 웃음, 로맨스 코미디를 통해서 말이다. 뮤지컬처럼 노래와 춤이 가득한 것이 아니기에 현실에서 있을 법하지만 현실에서는 더 큰 슬픔을 느끼며 살아갈 우리에게는 있을 법하기에 위로가 되는 서사적 결말이 아닌가.


이제 종말 배경의 북유럽풍 뮤지컬적 로맨스 코미디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막을 내릴 시간이다. 어떻게 끝내야 할지 감을 못 잡겠다가 영화에서 이런 부분도 눈여겨보면 재밌겠다 싶은 부분을 정리하며 끝을 내면 어질어질하게 뒤섞인 이 영화의 끝으로 적당할 듯 싶다. 영화의 번역과 관련해서 영화는 헬싱키를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종말의 도시로 보이게 하기 위해 영화의 결말부까지 우리가 흔히 자연이라고 말하는 혹은 자연이라고 느끼는 요소를 화면에서 보여주지 않는다. 헬싱키는 모든 것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문명의 요소로만 가득하고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말 없는 장승처럼 멍하니 서있다. 그들의 주변에는 고요함만이 있거나 도시의 무언가를 수리하거나 짓는 것과 같은 인위성에 기반한 소리로 가득하다. 그러다 결말부에서 영화는 처음으로 호수, 낙엽, 거리의 가로수 등의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러한 자연의 이미지들도 생명력이 넘치지 않는다. 파면 하나 없는 호수의 모습은 너무나 고요해 외로운 것처럼 보일 수 있고 낙엽과 가로수는 북반구의 차가운 바람에 쓸쓸하게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종말로 가득한 헬싱키와 비교하면 인위성이 느껴지지 않는 자연의 모습에 오히려 생명력이 느껴진다. 삶에서 지나치기 쉬운 소소한 것들에서 슬픔과 환멸을 이겨낼 수 있는 생명력이 숨어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미미한 듯한 생명력조차 결국 삶을 지탱하는 사랑으로 이어질지 누가 알까.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삶은 사실 소소한 웃음으로 가득한 소희극(小喜劇)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사랑하자. 내일이 종말이라고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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