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 연휴 KTX 안에서 나정식에게 선전포고를 한 뒤, 나는 곧바로 서울의 친정으로 향하지 못했다. 명절 직후, 나는 중국 출장에서 얻어온 피로와 스트레스가 겹쳐 몸살감기에 제대로 걸려버렸다. 며칠 동안 열과 오한에 시달리며 시름시름 앓았다. 정식은 KTX에서의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몸 상태 때문인지, 명절 동안의 일에 대해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며칠 후, 몸이 회복되지 않아 찾아간 병원에서 나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축하합니다. 임신이세요."
임신! 그 한마디는 나의 모든 절망과 분노를 씻어 내리는 듯했다. 신혼여행 내내, 결혼식 전날 밤 내내 나를 짓눌렀던 시월드의 무게, 그리고 정식과의 해묵은 갈등까지, 모든 것이 새 생명의 기적 앞에서 무력해졌다. 모두가 기쁨에 사무쳐, 명절의 슬픔과 냉장고의 전쟁은 잠시 잊혀졌다. 나는 '엄마'가 된다는 프로젝트의 마무리를 앞두고 다시 한번 '일잘러'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기분이었다.
몸을 추스르고 복귀한 회사. 나는 프로젝트가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 만큼, 임신 초기 증상을 숨기고 최대한 열심히 일했다. 팀원들에게 임신 소식을 알린 것은, 이제 막 마무리 보고서 작성을 시작하려던 때였다.
"팀장님, 저 사실... 임신 6주 차예요. 중국 출장도 무사히 마쳤습니다. 끝까지 잘 마무리하겠습니다!"
팀장은 처음에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지만, 다음 날 아침 나를 조용히 불러 앉혔다.
"한여름, 임신 축하해. 이제 몸 조심해야겠네. 그런데 이번 프로젝트, 워낙 중요한 일이라 혹시라도 무리가 가면 안 될 것 같아. 우리도 여름이 배려도 해줘야 하고."
'배려'라는 단어가 내 귀에 비수처럼 꽂혔다.
그리고 그날 오후,
"다음 주 월요일부터 지원부서로 발령 났어. 프로젝트는 조 선임에게 인수인계하고, 여름이는 이제 출산 전까지 비교적 업무 강도가 낮은 곳에서 몸 편히 있다가 휴가 들어가."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팀장님, 저는 괜찮습니다. 제가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중국 출장도 소화했는데, 한국에서 마무리 못 할 리가 없습니다. 지원부서는 제 커리어와 아무 상관없는 한직(閒職)입니다. 저는 배려가 아니라 제가 시작한 일의 완수를 원합니다!"
나의 항변에도 팀장은 냉정했다.
"이건 회사의 결정이야. 임신한 직원에게 무리한 업무를 시킬 수 없다는 거야. 여름이 네 능력은 출산 후에 다시 빛을 내자. 이건 순환 보직의 개념이야. 잘 알잖아."
순환 보직? 내가 밤낮없이 매달렸던 신규 프로젝트는 나를 배제한 채 조 선임에게 넘어갈 것이다. 나는 '임산부'라는 꼬리표와 함께 내가 쌓아 올린 커리어에서 강제로 밀려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유리 천장에 머리를 박은 듯한 충격과 분노에 사로잡혔다.
"팀장님, 제가 임산부라서 지원부서로 가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차별입니다. 저는 인사팀에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겠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제가 마무리해야 합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회사와의 대립각을 세웠다. '능력 있는 워킹맘'이 되겠다는 나의 꿈은, 출산보다도 빠르게 유리 천장에 부딪혀 깨져버렸다. 새 생명에 대한 축복은, 회사의 차가운 현실 앞에서 너무나도 무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