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방죽을, 윤희중과 하인숙이 걷고 있으렷다. 무진에서 자기를 꺼내 달라고, 서울의 음악대학 성악과를 나온 사람으로서, 속물들에 둘러싸여 '목포의 눈물'을 부를 수밖에 없게 하는 게 무진인 양, 제발 자기를 서울로 데려가 달라며 저 방죽에서 하인숙은 오페라 나비부인의 아리아 '어떤 갠 날'을 부른다.
윤희중은 그런 그녀에게 약속한다. 그러겠노라고. 그리고 그가 젊은 날 묵었던 방을 찾아 그녀의 조바심을 빼앗아 준다.
그러나 그 다음날, 제약회사 전무 자릴 꾸리는 동안 고향인 무진에 가있으라던 아내가 보낸 전보 '27일 회의 참석 필요, 급상경 바람 영.'을 받고 희중은 하인숙에게 편지를 쓴다. 그리곤 찢어버린다. 그리곤 무진을 떠난다.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그가 쓰기도 찢기도 한 편지는 이렇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 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어 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소식을 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 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무진은 아니지만, 안개도 없는 날이지만, 심지어는 저 보이는 게 방죽이 아닐 수도 있지만, 보이는 저것 앞에서 윤희중이 선택한 비겁과 부끄러움을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