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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금평 Nov 12. 2021

인도에서의 조용한 물난리

전수천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모처럼 가족과 외식을 하고 지난달 힘겹게 개원식을 마친 문화원으로 향했다. 토요일이었지만 밀린 숙제들을 해치울 요량이었다. 길 건너편에서 바라본 한-인도 40주년 기념 현수막은 태극기와 더불어 주인도 한국문화원의 존재감을 당당하게 어필하고 있었다. 문화원 건물을 임차하는 과정에서 인도 부자들과의 지난했던 실랑이, 사기 사건, 리모델링하는 동안 건물주와의 밀당 등을 돌이켜보니 개원에 성공했다는 점, 그저 외관이라도 갖추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문화원 건물 절반을 덮고 있던 현수막이 제대로 고정되지 않아 한쪽 끝은 바람에 너덜거리고 있었다. 작업자를 부르려면 월요일까지는 잘 버텨주어야 할 텐데......


문화원 현관에 들어서니 이이남 선생님의 미디어 아트 ‘박연폭포’는 전원을 꺼두었는지 쉬고 있었다. 건물 구석구석에는 리모델링 하자를 보수하는 사람들이 페인트 땜질, 주차장 바닥 마무리, 에어컨 보강 공사 등을 진행하고 있었다.     


주인도 한국문화원 전경(2013.1)

1층에 있는 전시장을 슬쩍 둘러보고 돌아서려는데 어둑어둑한 저만치에서 가느다란 낙숫물 소리가 들려왔다. 전수천 선생님의 설치작품 ‘Reality in Time 2012`.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쉼 없이 달리는 남자(물론 그도 오늘은 쉬고 있었다)와 그를 바라보고 있는 작은 ‘토우’ 사이에서였다. 천장에서는 흥부네 초가집 빗물 새듯 몇 군데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고 바닥은 이미 고인 물로 흥건했다. 문제가 있는 것들은 왜 다른 사람들 눈에는 잘 안 띄고 책임 있는 사람 눈에만 먼저 들어오는 것일까......?

    

우선 낙숫물을 받아줄 양동이가 급했다. 이 물이 넘쳐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날엔 반층 아래에 설치되어 있는 인도 작가 비나이 샤르마(Vinay Sharma) 선생님의 종이 작품이 엉망이 될 것이다. 문제의 발단은 3층에 있는 수도 파이프 파열이었다. 이미 3층 복도를 넘실거리던 물은 건물 내벽을 타고 1층 천장에까지 이르렀으니 가느다란 3단 폭포를 연출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이남 선생님은 모니터 3개를 수직으로 연결해 겸재 선생님의 진경산수 "박연폭포"를 미디어 아트로 재현했다. 그 진경산수가 잠시 꺼져있는 사이 "박연폭포"는 인도 문화원 건물에 "실경"으로 구현된 것일까......   


경비는 여기저기 전화를 하고 보수 작업하던 인부들은 소리소리를 지르며 수선을 떨었다. 누군가 파열된 수도 파이프를 틀어막고 나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다들 젊은 청소부 Anil 만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처리해야 할 물이 많거나 적거나, 급하거나 급하지 않거나 이제부터는 '청소'가 직업인 청소부가 해야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Anil은 주변의 시선에 둘러싸여 천천히 양말을 벗더니 바지를 무릎까지 말아 올렸다. 복도에 흥건하던 물은 Anil의 밀걸레를 따라 천천히 화장실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게 급할 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다급하던 내 마음이 오히려 잦아들었다.

     

나라도 Anil을 거들어 볼까 생각했지만 단념하고 말았다. 작업하는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 출신성분이 혹시......’하는 눈초리를 받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다. ‘해결될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 없고, 해결되지 않을 문제라면 걱정해도 소용없다’는 티베트 속담을 되새겼다.

      

문화원 건물에 이런 물난리가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물이 한번 훑고 간 벽면은 페인트가 부풀어 오르기 때문에 이미 있는 흔적에 새로운 엠보싱 문양이 한층 더해질 것이다. 대충 물난리가 수습되어가는 것을 보고 개업 준비로 바쁜 문화원 부속 카페로 내려가 연한 커피 한잔을 주문했다. 인도의 겨울도 인도 사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춥다. 커피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문화원에 입주한 `카페 Korea`의 60 루피 커피는 그 따뜻함만으로도 마음을 녹여주었다.  3인용 소파가 두 개, 4인용 테이블이 10개나 되는,  아직은 텅 비어서 아늑한 카페를 둘러보니 기분이 한결 아졌다.

     

커피 한잔을 다 마시고 나올 때까지 Anil의 맨발은 아직도 차디찬 물속에 반쯤 잠겨있었다. "이따가 뭐 좀 사 먹어요"하며 100루피(2천 원) 한 장을 건네주니 그는 손을 뒤로 감춘 채 극구 사양했다. 그의 헤진 바지 호주머니에 100루피를 꽂아주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시커멓지만 환한 그의 얼굴에서 헐벗은 인도의 성자를 본 것일까. 사무실에 들렀더니 인도 전화회사 직원 두 사람이 전화 배선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문화원 개원 이틀 전까지 마치기로 했던 작업인데 마감 시한을 한 달이나 넘기고 있었다. 이 정도 문제는 문제도 아니지. 뭔가 사연이 있지 않겠어?”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20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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