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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금평 Mar 28. 2023

죽음에는 문턱이 있다

서울 산책

살다 보면 가끔 "죽을 뻔한 때"가 있다. 나는 주로 물을 통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첫 번째 문턱은 초등학교 시절 마을 형과 둘이 냇가에서 목욕하다가 '키가 넘는 순간'에 경험했다. '이거 뭐지?' 하며 물을 한참 먹고 있는데 다행히 그 형이 꺼내 주었길래 망정이지......

두 번째 문턱은 군 복무 당시 해안 근무 중에 넘어봤다. 시원치 않은 수영 실력으로 바다를 향해 조금씩 헤엄쳐 나갔나 싶었는데 뒤돌아보니 갑자기 뭍이 까마득했다.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빠져나오려는데 힘이 모잘랐다. 혹시 하고 발을 내디뎠더니 발끝에 바위 끝이 걸렸다. "아!...... 이렇게 사는구나......!"


지난 주말에는 고향에 내려갔다가 색다른 '문턱'을 경험했다. 한동안 마시지 않던 소주를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이 마셨던 것이다. 논쟁과 불만을 섞어 빚은 술은 독극물과 다름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키보다 더 큰 잡초들 사이 진창에 누워있었다. 잡초들 사이로 내려온 파랗고 차디찬 새벽하늘이 나를 깨워준 것이다. 그 밤을 어떻게 헤매고 다녔는지 기억은 없었지만 문득 세월호 관련 인사가 들판에서 죽은 지 몇 주 후에야 부패한 사체로 발견되었던 사건이 떠올랐다. '살려면 이곳을 어떻게든 빠져나가야겠구나'하는 생각에 털고 일어섰지만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허우적거렸을까...... 필름은 다시 끊겼고, 점심때쯤이 되어서야 시골집 안방에 누워있는 나를 발견했다. 늙으신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계셨으니 망정이지 한심한 내 몰골을 어머니께 들키기라도 했다면 어쩔 뻔했나. 거실에 걸쳐져 있는 축축한 셔츠와 바지에는 무릎과 어깨 부분에 큰 구멍이 뚫려있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왼쪽 얼굴에는 눈썹에서부터 안경태 모양으로 생채기가 나있었다. 아스팔트와 내 얼굴이 상봉을 했던 모양이다. 왼쪽 안경알에 남아있는 빗살무늬 흔적은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 팔이며 무릎에 난 상처들은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오기 시작했고, 양 손바닥에 여러 갈래로 난 생채기는 나를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름 살려고 상당히 버둥거렸던 모양이다.


못쓰게 된 안경, 찢겨 축축한 옷, 몸에난 곳곳의 상처들과 더불어 지난밤 행적을 시간대별로 담고 있는 알리바이는 휴대폰 헬스 앱의 걸음 기록이었다. 죽음이 나를 방문했다면 아마 진창에서 잠들어 있을 때였을 것이다.  


12:30~02:30,  1517걸음: 소주집에서 나와 우왕좌왕하던 중 아스팔트와 대면하고 진창에 빠졌던 모양  

02:30~04:30,       0걸음: 진창에서 잠이 들다

04:30~05:30,   831걸음: 진창에서 벗어나 시골집으로   

05:30~13:00,       0걸음: 방에서 잠이 들다


다음날 사내 사회공헌봉사단 발대식이 있다고 해서 반창고로 얼굴을 치장한 채 참석했다. 기본교육 강사는 '장기 기증'이 가장 높은 단계의 봉사라고 들려주었다. 사후에라도 누군가가 내 장기를 써먹을 수 있게 하려면 평소에 관리를 잘해 두어야 한다. 숭고하고 예견된 죽음이 있는가 하면 사실은 너무나 허망한 죽음도 많기 때문이다. 죽음이 두렵고 거창한 통과의례가 아닌 산책을 나서는 것처럼 가벼운 여정일 수도 있겠다는 색다른 깨달음에 이르다.(2022.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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