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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필 Jul 01. 2022

보다 더, 아름다운 삶을 향한 <아사코>의 궤적

#1 하마구치 류스케, 아사코(2018)


※ 이 글을 포함한 모든 글들은 알게 모르게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로맨스라고 하기엔 좀 낯선

그저 그런 사랑이야기인 줄 알았다. 첫사랑과 꼭 닮은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 반복적인 장면이 사용되고 영화의 리듬감 변주되면서 일반적인 사랑 얘기의 호흡과는 다르다고 느껴짐에도 별다른 생각 없이 보고 있었다영화의 중반부까지는 부끄럽게도 <아사코>가 흔한 로맨스 영화와 다름없는 '그저 그런 영화'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중반부부터 영화의 분위기에 뚜렷한 균열들이 일고, 식당 시퀀스에서 '료헤이'와 '바쿠'가 동시에 등장하자 영화는 지진만큼이나 요동치기 시작한다. 주인공들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들로 말미암은 파행은, (아사코를 포함한) 인물들의 마음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를 흔들고, 무던하게 영화를 보고 있던 관객들을 당혹시킨다. 



아사코(카라타 에리카 분)는 사진전에서 우연히 보게 된 바쿠(히가시데 마사히로 분)와 운명처럼 사랑에 빠진다.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잠시 어딜 다녀온다던 바쿠는 한 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린다. 이후 아사코는 또다시 운명처럼 바쿠와 꼭 닮은 료헤이(히가시데 마사히로 분)를 우연히 마주한다. 처음에는 바쿠와 너무도 닮은 료헤이를 밀어내지만, 이내 료헤이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아사코는 친구 하루요(이토 사이리 분)를 통해 바쿠가 가까운 곳에 있고 유명인사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바쿠의 등장에 마음이 흔들리는 아사코는 그래도 바쿠가 타고 있는 밴 차량에 작별인사를 하는 등, 바쿠에 대한 마음을 정리한 듯 보였다. 그러나 료헤이와 아사코를 포함한 모두가 모인 식당에 바쿠가 돌연히 나타나자 잠시의 고민도 없이 황망히 그를 따라간다. 하지만 바쿠와 함께 떠나가던 길에, 아사코는 별안간 바쿠에게 이별을 고하고 다시 료헤이에게 돌아간다.


<아사코>의 표면적 이야기는, 언뜻 보면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한 여자의 여정으로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아사코>에는 좀 더 살펴볼 부분이 있다. 아사코가 영화 내내 방황하면서도 부단히 따라가던 궤적은 무엇일까.



꿈과 현실 사이에 불완전한 자아

바쿠는 말 그대로 ‘꿈’ 같은 남자다. ‘바쿠’라는 이름이 꿈을 먹는 전설의 동물인 바쿠와 동일하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바쿠는 '아사코가 잠에서 깨면 사라지는 존재'라는 점 등 영화 곳곳에 바쿠와 꿈에 대한 연결고리를 엿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아사코>에서 바쿠와 대응되는 료헤이는 '현실'이다. 료헤이는 바쿠처럼 아사코를 불안하게 하지 않고 소박하지만 따뜻하게 지켜준다. 게다가 '료헤이'와 '바쿠'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사코의 이름이 ‘아침’의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침은 밤과 낮 사이의 시간이며, 꿈에서 현실로 넘어가는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사코는 영화 내내 바쿠라는 '꿈'을 추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원래 소극적인 성격임에도 사진전에 우연히 스친 바쿠를 따라가기도 하고, 바쿠처럼 사라져 버린 길고양이가 보이지 않자 찾아 나서기도 한다. 그렇게 바쿠의 등장 이후 줄곧 꿈에 세계에 맴돌던 아사코는 료헤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일시적으로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듯 보인다. 바쿠 차량에 작별인사를 하고, (상상 속) 바쿠의 방문에 질겁을 하고, 료헤이에게 모든 사실을 고백하고 결혼을 약속하는 것 등이 그 방증이다.  하지만 료헤이의 노력과 아사코의 결단은 바쿠의 갑작스러운 등장 앞에 무력하게 허물어진다. 료헤이의 다정함에 잔잔해져 가던 아사코의 세계는, 바쿠의 등장에 불시에 전복된다. 료헤이와 아사코, 그리고 친구들 모두가 모인 식사 자리에 바쿠가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바쿠를 따라 아사코는 돌아보지도 않고 료헤이를 떠나간다. 아사코는 현실을 저버리고 다시 한번 꿈의 세계로 가버린다.



그러나 꿈을 좇던 아사코의 세계는 다시 한번 전복된다. 바쿠와 차를 타고 떠나던 아사코는 잠들었다가 깨어나는데, 시간은 야트막한 새벽이다. 제방에 올라 바다를 응시하던 아사코는 별안간 바쿠에게 이별을 고한다. 료헤이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바쿠와 함께 떠나던 아사코이기에, 이런 행동은 관객에게 다시 한번 의문을 준다. 아사코의 심경에는 무슨 변화가 있었을까. 환상 같은 오로라를 꿈꾸다가 어두운 현실의 바다를 목도한 까닭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다만 새벽이라는 “시간”에 주목해 본다. 이전에 바쿠는 아사코가 잠들고 깨어난 후에, 밤이 지난 "새벽"에 떠나갔다. 밝아지는 날을 보며 과거 이별에 대한 불안한 기억이 떠오른 것이 아닐까. 언제 사라져 버릴지 모를 불안함 꿈(바쿠)보단, 항상 따뜻하고 다정한 삶(료헤이)에 대한 고마움이 늦게나마 아사코의 마음을 채운 것이 아닐까.


영화 초반 사진전에서 아사코는 한 장의 쌍둥이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는데 이 장면이 의미심장하다. 꼭 닮은 두 남자 사이에서 아사코는 혼란스럽다. 하지만 결국 아사코는 료헤이에게 돌아간다. 아사코의 자아는 꿈과 현실에서 불안하게 외줄을 타고 양쪽 사이를 방황한다. 그러다 결국 현실로 돌아오고 마는 여정을 통해 불완전한 자아는 성장한다.



그래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사코에 돌아가라고 소리치고 달아나 버리는 료헤이에게, 아사코는 힘껏 달려간다. 아사코가 누군가를 따라가는 모습은 처음이 아니다. 영화 초반 사진전에서 바쿠를 소극적으로 따라가는 모습은, 여러 가지 사건을 겪은 후, 적극적으로 료헤이를 쫓아가는 모습에 겹쳐진다. 말하자면, 아사코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은 꿈에서 현실로 변해간다. "어찌 되었든 아침의 시간은 낮을 향해 흐르는 것처럼."


무모할 정도의 꿈에 대한 집착은 삶에 생채기를 낸다. 망상으로 보일 정도의 꿈만을 좇다가 삶을 망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사코는 료헤이 앞에서 바쿠를 따라가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해 료헤이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단호하고 냉정한 듯 행동해도 아사코가 돌아올 때까지, 아사코와 함께 살던 진탄(고양이)을 보살피는 또 별말 없이 아사코가 들어올 수 있돌혹 현관문을 열어두는 료헤이는 여전히 다정하다. 그 다정함에 아사코는 삶으로 회귀한다.


누구나 실수를 한다. 어쩌면 개인의 역사는 실수와 실패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불어난 강물처럼 과오가 켜켜이 쌓여도, 인생이 그러하듯 어쨌든 강은 쉬지 않고 흘러간다. 아사코가 더러운 강물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실수도 하고 조금 늦기도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정말 소중한 사람을 소중하게 대해”줄 여지가 있다는 것, 또 “아직 젊다는 것” 우리는 실수했고 실수할 것이다. 부단히 실수하며 살아가는 모든 생들에게 영화의 대사를 빌려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도 괜찮아요, 그저 “때론 뭐가 옳은 건지 헷갈릴 때도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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