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우리 집에는 부부 공동계좌가 없다.
자기가 번 돈을 각각 알아서 관리하고 있는데 남편은 가계부 앱을 사용하고, 나는 몇 개월에 한 번씩 내 계좌 돈이 많아졌나 혹은 적어졌나 확인하는 걸로 그친다. 결혼한 지 일 년 그리고 삼 개월이 지난 현재, 다행히 내 계좌에 돈이 차곡차곡 모여지고 있기는 하는 것 같다. 해외여행을 안 간지도 거의 반년이 되어가고, 고정지출 중 하나인 집 월세가 내가 부담하는 것 빼고는 다 남편이 알아서 하는 편이니까.
같은 회사 사내부부인 우리는 둘 다 주 3일 정도 재택근무인지라 평일에도 하루 세끼를 집에서 먹어야 할 때가 많다. 오픈식 주방이었던 복식 스튜디오에 살 때까지만 해도 배달음식을 자주 시켰던 우리는 작년 연말 공간구분이 잘 된 널찍한 아파트로 이사 오게 되었는데, 주방이 마음에 들었는지 남편은 뒤늦게 요리에 재미를 들였다. 이게 뭔 횡재냐, 남편이 알아서 뭘 먹을지 결정하고 음식 식재료도 미리 배달시킨다, Sam’s에서든 허마선생(배달 가능한 식재료 마트)에서든.
결국, 돈 관리도 안 하고 요리도 안 하는 나에게는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오늘은 무슨 식재료가 배달이 되는지가 서프라이즈일 수밖에 없다. 내가 뭘 먹겠다고 남편에게 미리 예약주문을 하지 않는다면. 오전에 꼭 해야 하는 대화도 "남편, 오늘 점심은 뭐로 시킬까?"로부터 "남편, 오늘 점심 메뉴는 뭐야? "로 바뀌었고, 뭘 먹어도 좋은 돼지먹성인 나는 더 이상 메뉴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하다.
상해의 여름은 무덥다.
단순히 기온이 높다가 아니라 습도가 높은 편이라 찜통더위가 대부분이다.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회사에서 일한다는 게 제일 고마워지는 계절이 여름인 것 같다. 땀도 안 흘리고 선크림도 바를 필요 없이 잠옷 바람에 에어컨 빵빵 터지는 곳에서 일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여름은 여름인지라 느껴지는 열기는 피할 수 없다. 발코니에서 빨래를 너는 1분 사이마저. 나흘 전 (화요일), 오후 근무 시작 전 잠깐이나마 한가하게 샤오훙수를 뒤적이며 아무 사진이나 영상을 보고 있다가 수박 영상을 보고 중얼거렸다. "와, 수박은 숟가락으로 파 먹어야 맛있는데 진짜 오래 안 먹었네…".
그리고 열몇 시간이 지난 수요일 아침, 평소 재택근무와 다름없이 남편이 식재료 배달을 받으면서 내는 현관 쪽 인기척에 잠을 깼다. 별생각 없이 재택근무를 하면서 점심시간을 기다리다 갑자기 차가운 음료가 마시고 싶어 냉장고를 여는 순간, 어머! 내 눈앞에 수박이 나타나다니, 심지어 먹기 좋게 잘라서 파는 포장된 수박이 아니라 진짜 숟가락으로 파먹을 수 있는 오리지널 통수박! 무한반복 포옹박치기로 내 기쁨을 실시간으로 남편에게 전달한 뒤 이 수박은 오늘 점심 후식으로 먹기로 결정했다.
세심하고 깔끔하다고 알려진 상해 사람들은 월병마저 조심조심 칼로 잘라 나눠 먹는지라 (5년 전 처음으로 상해 사람들이 이렇게 월병을 먹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먹었다) 남편에게 물었다. 난 숟가락으로 먹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다행히도 남편은 어제 내 중얼거림을 진지하게 들었고 숟가락으로 퍼먹기 위하여 통수박을 샀다면서 웃었다. 자기는 너무 배불러 조금 쉬다가 나중에 먹을 테니 나보고 먼저 먹을 만큼 다 퍼먹어라고 했다.
어릴 적 감성을 살려 정말 크고 둥글게 한 숟가락 팠다. 지금은 씨 없는 수박이 많기에 큰 차이는 없겠지만 어렸을 때 자주 먹었던 수박은 씨가 정말 많아 가운데의 씨 없고 맛 좋은 부분이 제일 맛있는 부분이었다. 정확히 몇 살까지 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릴 적 나는 집에서 통수박이 절반으로 잘라지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숟가락을 들고 빛의 속도로 뛰어가 가운데 부분을 파먹기를 좋아했다. 동생에게 양보는커녕 제일 좋은 부분을 골라 혼자 지저분하게 먹는다고 부모님의 꾸중을 꽤 받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만큼 수박 가운데 부분의 맛 위력은 대단했던 것 같다.)
그렇게 음식 앞에서 양보 따위 없던 내가, 당연하게도 입에 가져갔어야 할 이 완벽한 수박 덩어리를 파 낸 뒤 0.1초 망설임도 없이 남편이 앉아 있는 소파 앞으로 뛰어갔다. 오른손으로는 수박 덩어리가 얹힌 숟가락을 들고, 왼손으로는 혹시 수박이나 수박 물이 떨어질까 두려워 바로 밑으로 어중간하게 받친 모양으로. 남편이 행복하게 입을 벌려 그 큰 수박 덩어리를 한 입에 넣었다.
내가 너무 크게 파내어 남편이 1분 정도 고생하다가 겨우 다 먹고 행복 반 핀잔 반으로 나한테 구시렁대는 모습에 미안했지만 너무 귀여웠다. 분명히 배가 불러 안 먹겠다고, 나 혼자 먼저 먹어라고 했던 남편인데 내가 조금 작은 크기로 수박을 파서 입 가까이에 들이댔더니 날름 잘 받아먹었다.
결국 남편 한 입, 나 한 입 이렇게 절반 넘게 먹으니 나도 배가 불렀다. 하긴, 점심을 먹은 뒤 바로 후식으로 수박 반통을 먹는 게 정상적인 양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맛은 있는지라 조금 무리하면서도 다 먹었다.
남편이 내린 아메리카노 두 잔을 들고 함께 서재로 들어가면서 우리의 재택근무는 오후에도 계속됐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남편이 매일 준비하는 밥과 커피, 그리고 간혹 있는 "수박 사건" 비슷한 소소한 에피소드들. 20대 초반부터 거의 비혼주의를 외치면서 살아온 내가 갑작스럽게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고, 매일매일 이 결정에 감사하게 되는 현재 일상을 가끔이라도 기록해야겠다.
소소하게 사랑을 확인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