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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는 살아생전에 금서를 읽고 그에 대해 논했다는 이유로 왕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금서를 읽은 무리들은 형장으로 끌려가 사형이 집행되기 전의 순간까지를 겪었으나 사실 왕은 실제로 형을 집행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그저 그동안 자신에게 대항하려던 젊은이들에게 따끔하게 겁을 주는 동시에 스스로의 자애로움을 알리는 해프닝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죽음 직전에 살아난 것을 기적처럼 여기고 이후로 삶에 대해 이전까지 견지하던 태도를 바꾸어 그 어떤 순간에도 좌절하지 않고 버티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하지만-
일상에서 우리가 이런 극적인 순간들을 마주쳤을 때에도 도스토예프스키처럼 감사를 느껴야 하는가에 대해 의문이 든다.
이것들은 어쩌면 인간을 일부러 궁지에 몰리게 한 뒤 적절한 순간에 기적을 연출해 삶에 대한 경외와 감사를 불러일으키려는 신의 눈속임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도 한다.
모든 상황들이 신의 장난에 불과하고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해도 그 순간을 지나온 인간이 겪었을 고통은 실재하는 것이며 그는 실제로 죽음에 다녀온 것과 마찬가지의 상태가 된다. 그럼에도 그런 장난을 친 신에 대한 분노는 쏙 빠진 채 가련한 인간은 극한의 경험을 계기로 정직하지도 않은 삶에 더욱 감사를 하고 살게 된다는 건 의지를 갖고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인간에 대한 기만이자 조롱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은 신이 존재하고 인간의 삶에 개입한다는 전제하에 해 본 것들이지만 만약 신도 없고 있어도 개입하지도 않을 경우, 인류가 겪는 일련의 상황에 대해 우리는 맹목적인 감사를 갖고 살아야 하는지 아니면 허공에 대고 어떤 분노라도 쏟아내도 괜찮은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자연의 일부인 나무나 돌처럼 우리 역시 이런 상황에 대해 초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신이 있을 것도 같다고 생각 드는 순간이 간혹 있는데 그건 이따금씩 내면에서 분노라는 감정이 구체화되어 표출될 때이다. 만약 이렇게나 명확하게 느껴지는 '화'라는 감정의 상대방이 없다면 방향성 없는 '화'가 이런 정도까지 생겨나는 것이 과연 자연스러운 가 하고 말이다.
이런 감정은 나도 모르는 새 상대방인 신에게 이미 도달해있고 신도 그에 상응하여 나를 비롯한 인간들의 인생에 일상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