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은 <느낌의 공동체>에서 박용하의 시를 언급하면서 '말의 인플레이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박용하의 시에는 "답변기계들처럼/답변기계들처럼/말끝마다……최선을 다하겠습니다/……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시에 '……최악을 다하겠습니다'라는 재치 있는 제목을 얹어 놓음으로써 인플레이션에 가려져 있던 '최선'의 본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말의 인플레이션이란, 최선을 다하겠다는 표현이 지나치게 자주 사용되어 더 이상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어떤 말을 너무나 남발한 나머지 말에 담긴 고유한 의미나 진정성이 다소 퇴색되어 버린 현상을 일컬을 것이다. 그리고 인플레이션을 거친 말들은 결국 빈말이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나는 빈말을 싫어했다. 내게 빈말이란, "언제 한번 밥 먹어야지."처럼 밥 먹을 생각이 딱히 없으면서 인사치레로 건네는 말이다. 밥 먹을 생각이 없다는 점에서 말에 담긴 의미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으며, 밥 먹자는 제안으로 해석할 수 없으므로 말의 진정성을 믿기 어렵다는 점이 빈말의 특징일 것이다. 빈말을 발화하는 경우, 자신의 발화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므로 발화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빈말을 자주 사용하는 자들을 경계해왔고 또 책임질 수 있는 말만 내뱉기 위해 많은 말을 아껴왔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인플레이션을 거쳐 의미가 다소 비어버린 말들도 어느 정도의 효용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언제 밥 한번 먹자는 인사치레가 정말 밥 약속을 잡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설사 밥을 먹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렇게 인사를 건네는 순간에 함께 밥을 먹고 싶을 만큼 상대를 반가워하는 마음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밥 한번 먹자는 말만큼이나 빈말처럼 보일까 두려워 내가 말하기 어려웠던 말들이 있다. 연인 간에 하루가 멀다 하고 사용하는 '보고 싶어'는 지금 당장 만나러 가지는 못하지만 지금 당장 만나러 가고 싶을 만큼 보고 싶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표현은 비록 실수도 잦고 헤매더라도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보고 싶다고 했는데 보러 가지 않았다고 해서, 열심히 하겠다고 해놓고 실수를 했다고 해서 빈말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단지 지금 당장 볼 수 없으니까 보고 싶다고 섣불리 말하지 못하고, 잘 해내지 못하니까 열심히 하겠다고 섣불리 말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던 옛날의 나는 엄격성 속에 갇혀 마땅히 교류해야 하는 의지와 정서 따위의 중요한 걸 죄다 놓쳐버리고 있었던 셈이다. 지킬 말만 내뱉는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말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
그래서 가끔은 말의 인플레이션에 기대 조금의 진심과 조금의 의지와 조금의 감정들을 건네보기로 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조금 더 살아 있는 말로 바꾸어 표현하거나 말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보여주면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고 싶어' 말하다가도 때로는 '자다가 깼을 때 내 눈앞에 당신이 있으면 좋겠어'라는 구체적인 말로 표현하면 될 것이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대신 실패 없는 성과보다 최선을 다하는 과정으로 말의 가치를 실현해내면 될 것이다. 빈말을 내뱉지 않겠다고 애쓰기보다 빈말에 진심이 가려지지 않도록 무딘 애를 쓰는 사람이 되어야지, 오늘도 내게 남은 건 다짐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