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글씨
“어미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씨를 쓰거라.”
한석봉이 어린 시절에 서예 공부를 하던 중, 갑자기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지요. 이때 어머니는 중도에 공부를 중단하고 돌아온 아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불을 끄고 글을 쓰게 하였습니다. 글씨를 쓰는 아들의 옆에서 어머니는 떡을 썰었는데, 나중에 불을 켜고 보니 어머니가 썰어 놓은 떡은 가지런했던 반면 한석봉이 쓴 글은 줄도 맞지 않고, 글씨도 엉망이었다지요. 그래서 그 새벽에 아들을 내쫓았다는 이야기
요즘의 아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면 모두들 엄마가 나쁘다고 합니다.
"한석봉 엄마 나빴다. 혹시 계모 아니야?"
"아니 불 끄고 어떻게 글씨를 바르게 써. 내기를 하려면 똑같이 엄마도 글씨로 해야지."
"엄마 보고 싶어서 찾아왔을 텐데 엄마는 아들이 안 보고 싶었나 봐." 등등등
덕분에 한석봉은 왕희지와 안진경의 필법을 익혔으며 계속 연구하여 해서, 행서, 초서 등에 모두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국의 서체와 서풍을 모방하던 풍조를 깨뜨리고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했다지만 애석하게도 추사체는 있어도 한석봉체는 없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을 인정받아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고 하지요. 그리고 중국을 몇 번이나 오가며 연경의 명필가들과 교류를 했다고 합니다. 추사체가 생겨난 배경도 제주도의 유배생활과 관련이 깊어서 파란만장했던 그의 일대기가 탄생시킨 걸작이었던 거지요. 당시 선비들이 과거 공부에 힘을 기울일 때 추사는 청나라의 선진 지식과 문물을 이해하고 체계화하는 데 정열을 쏟았고 ‘우리 것’을 창조해 다시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모두 자신의 뜻이었지요.
만약 한석봉의 어머니가 어미가 보고 싶어 찾아온 아들과 대결하지 않고 아침밥이라도 먹여 돌려보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김정희와는 서체와 다른 한석봉체가 추사체와 나란히 세계적으로 날리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글씨를 괴발개발 쓰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자신만의 기법을 찾아가는 중일지도 모르겠다싶다가도 예술은 기본과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거든요. 그래서 처음부터 연필 한 획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글자의 자형에 맞게 바르게 쓸 줄 아는 아이만이 응용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나중에 자신의 이름을 딴 특별한 글씨체를 창조할 아이가 나와주었으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