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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쌱 Jan 13. 2024

[단편소설] 찬란했던 순간

‘나’는 산을 좋아한다. 누구의 도움 없이 오로지 내 힘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도 매력적이었지만, 자연의 소리와 푸르른 녹음에 둘러싸인 채로 정상까지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드넓은 자연 속에 나라는 존재는 매우 작다는 걸 느꼈다. 그러다 보면 내가 가진 걱정 고민도 하찮게 느껴져 마음을 짓누르던 것들이 어느새 사라졌다. 또 정상까지 올랐을 때 약간의 성취감이 오랫동안 겪은 사회생활로 비뚤고 모나진 마음을 다시금 바로잡아주는 기분을 받았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엔 언제나 현실에서 도피하듯 산에 오르곤 했다.


5시가 조금 안 된 새벽,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는 뒷산에 오를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와 발걸음을 서둘렀다. 비교적 수월하게 정상에 도착한 나는 몰아쉬었던 숨을 고르며 땀을 닦았다. 올라오는 길에 사람을 마주치진 않았는데, 정상에는 중년을 벗어나 노년기에 접어든 어르신 한 분이 풍경을 감상하기 좋은 위치에 자리한 벤치에 앉아있었다. 나는 벤치로 다가가 조심히 반대편 끝에 앉았다.


“ 미안하지만 물이 있다면 좀 나눠줄 수 있겠는가? ” 

한동안 흘렀던 적막을 깬 건 어르신의 나지막한 물음이었다. 


“ 네 그럼요 잠시만요. ” 하고 대답하며 가방에서 물을 꺼내 건네드렸다.

“ 휴 고맙구만. ” 물을 두어 모금 마시고 다시 물병을 돌려주며 어르신이 물었다.


“ 산을 자주 올라오는 모양이지? ”

“ 네 생각이 많을 때 종종 올라오곤 합니다. ” 

나는 물병을 가방에 넣으며 멋쩍게 웃었다.

말문이 트여서 넉살 좋게 말을 붙였더니 어르신도 대화상대가 생긴 게 싫지만은 않으셨는지 두런두런 일상적인 이야길 하다 자신이 살아오셨던 이야길 해주셨다. 


[ 나는 2남 3녀 중에 장남으로 태어났지. 어린시절 기억은 늘 늘 고추장에 비벼먹던 밥 한그릇과, 잠잘 때 자장가 삼아 듣던 가래 섞인 아버지의 기침소리뿐이었어. 크면서 집안 분위기 파악이 대충 가능한 나이가 되니까 본능적으로 알겠더라고. 우리 집안이 유복하지 않다는 걸. 그러다 보니 항상 동생들 먼저, 나는 나중에. 철이 일찍 들 수 밖에 없었지. 그러다 18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내가 장손으로써 이 집안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하나만이 내 온 몸을 감돌았지. 막내 동생이 그때 나이가 국민학교 겨우 들어갔나? 그랬으니까. 더 큰 돈을 벌 궁리를 해야했던거야. 슬프고 그런 것도 없었어. 당장의 현실이 나에겐 더 무서웠거든. 그래서 그 길로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지. 내가 서울로 떠나던 날 어머니가 기차역에서 나를 붙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더군. 이제 생각해보면 어미 품을 떠나 타지에서 고생할 아들 생각에 걱정되는 마음 한 점, 똑똑했던 큰아들이 공부를 포기하고 일을 하러 떠나는 선택을 하게 만든 당신에 대한 자책의 마음이 한데 모아져서 눈물이 나셨겠지. ]


내가 공부를 좀 잘했거든. 약간의 장난기를 머금은 미소로 말하는 어르신의 표정엔 약간의 뿌듯함도 담겨 있었다. 잠시 한숨을 쉬며 숨을 고르던 어르신은 이윽고 말을 이어갔다.


[ 그렇게 올라온 서울에서 운이 좋아 맘씨 좋은 집주인 아주머니를 만나 지하 단칸방 하나 얻어 살면서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했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다가 점차 하루 벌어 이틀, 사흘, 나흘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어. 그렇게 일을 하니 점점 자리도 잡게 되어 작은 규모의 직장에 들어가 한 사람 몫을 하며 살게 되었지. 그런데 안정적으로 되고 나니 남은 건 텅 빈 자신밖에 없는 거야. 일만 해서 나에겐 이렇다 할 추억도, 경험도 없었거든. 먹고살기 바빠서 정작 나 자신 스스로 삶을 집중하지 못했던 거지. 그렇게 나이 29살쯤 됐나. 우연히 새롭게 입사한 여직원이 우리 부서에 인사를 왔어. 귀여운 외모에 똑 부러지는 깍쟁이 같은 말투. 동그란 얼굴형에 단발이 참 잘 어울렸지. 이상하게 들릴진 모르지만, 처음엔 복사뼈가 복숭아처럼 발그레해서 시선이 자꾸 가더군. 그러다 우연히 그녀의 옆에 서 있었는데 싱그러운 비누냄새가 살랑 하고 코끝을 맴도는 거야. 나도 모르게 코를 킁킁거리다 그런 나 자신에 화들짝 놀라서 두 발자국 멀어졌어. 어쩌다 한번은 그녀와 손끝이 부딪쳤는데 찌르르 전율이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 그때 알았어. 이 감정이 사랑이란 것을 ]

이 말을 할 때 어르신의 표정에선 살짝 앳된 소년 미가 감돌았다. 


“ 아니 그럼 어르신 인생에서 첫사랑이었던 겁니까? ”

봄바람처럼 간질간질한 내용에 살짝 부끄러워진 내가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 허허- 그렇지. 첫사랑이었지. ” 

그때를 회상하듯 살짝 눈을 감았다가 뜨며 어르신이 말했다. 


[ 마음을 자각했지만 나는 좀처럼 용기를 내지 못했어.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보려 다가가도 목구멍에 모래가 들어간 듯 껄끄러웠고, 막상 대화해도 기름칠을 하지 않은 기계처럼 뚝딱거렸지. 그녀 앞에만 서면 자꾸만 작아졌어. 그런데 한편으론 그녀 주변만 맴도는 것도 나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더군. 바라만 봐도 좋다는 감정이 뭔지 그때 알았어. 왜 그녀에게 고백해보지 않았느냐고? 흠. 연애 한번 제대로 안 해본 숙맥인 내가 그녀에게 남자답게 다가가는 건 과거에 나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 그리고 부족한 것 없이 잘 자란 것처럼 보이는 그녀에게 가난하게 자란 내가 다가가기엔 약간 자격지심도 있었던 것 같아. 남자로서 있어 보이고 싶은 얄팍한 심리가 나에겐 있었던 거지. 그렇게 뭘 해보지도 못한 채 속절없이 시간만 지났어.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나에게 뜬금없이 말하더군. 부모님께서 맞선을 보라고 했다고. 심장이 돌을 올려놓은 듯 답답하고 납으로 된 것처럼 한없이 무거워지더군. 근데 난 거기서 뭐라 대답했는지 아나? 잘 보고 오라고 응원을 해줬어. 그때 그녀의 복잡미묘한 표정은 아직도 눈에 선명하군. 그 표정을 보고 순간 내 안에서 아차 싶었어. 하지만 한번 뱉은 말은 종이에 스며든 물처럼 다시 주워담을 수 없더군. 내가 붙잡을 새도 없이 뒤돌아서 나에게 멀어졌어. 그렇게 한동안 소식을 듣기 힘들었지. 나중에 듣기론 맞선을 본 상대랑 잘 돼서 결혼할 것 같다고 하더군.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나 자신을 얼마나 다독였는지 몰라. 그 후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결혼하기 위해 마지막 퇴직 인사를 돌 때였어. 밝게 웃으며 인사하던 그녀를 바라보다 3초. 짧은 시간이었지만 눈이 마주쳤어.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더군. 그녀도 그랬던 것 같아. 이내 바로 고개를 돌려버리더라고. 그녀랑은 그게 마지막이었어. 그 뒤로 나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열심히 살다가, 회사 선배가 소개로 연결해준 지금 아내와 2년 연애 후 결혼을 하게 됐지. 착하고 좋은 사람을 만났어. 별 탈 없이 잘 살았지. 자녀도 아들 한 명에 딸 한 명 낳아서 아들 녀석은 벌써 대학교를 졸업했어. 나름 괜찮은 인생이라 할 수 있지. ]


어르신이 공허한 듯 담담한 어조로 풀어낸 이야기는 마치 한숨과도 같이 흩어져갔다. 나는 속절없이 어르신의 이야기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 이런, 내가 너무 많은 이야길 했군. 사실 어제 문자가 한 통 왔는데, 부고 문자였어. 그 친구 심장 쪽에 2년 전부터 문제가 있었다는데, 갑자기 안 좋아졌었나봐. 허망하게 갑자기 갔다더군. 사람 인생이라는게 참. 이미 다 지난 일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술렁술렁 거리는지. 괜히 생각이 많아져서 이렇게 산에 올라왔다네. ]


이 말을 끝으로 어르신은 조용히 다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너무나 고요하고 애가 타 나는 섣불리 말을 건넬 수 없었다. 그저 단 하나. 어르신이 고인을 깊게 애도(哀悼)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르신은 마치 자신의 할 일이 끝났다는 듯 이내 짐을 챙기며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셨다. 그러고는 잔잔한 미소를 띠며 나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건넸다.


“ 늙은이의 주책맞은 이야길 들어줘서 참 고맙네. 자네에겐 재미없는 이야기일 수 있었겠지만, 누군가에게 말을 하면서 털어내니 훨씬 속이 시원하군. 나는 먼저 내려감세. 다음에 인연이 된다면 또 보자고. ”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천천히 산에서 내려가는 어르신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르신의 삶의 발자취가 나에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산에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온다. 그들이 산에 가지고 올라오는 사연을 전부 헤아릴 순 없지만. 저마다의 짐을 가지고 올라와서, 훌훌 털어버리고 내려가는 사람들을 위해 산은 언제나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리라.


 어느새 하늘을 환하게 비추는 햇빛이 내 눈을 간지럽혔다. 강한 햇살에 나는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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