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UA Oct 26. 2021

[사이에서 : 두려움과 희망]

KUA Conte #16 : 페기 구겐하임 Peggy Guggenheim

# 페르낭 레제의 스튜디오 


“ 막스, 오늘도 그림 사러 나가요!


요즘 나는 열과 성을 다해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전역의 스튜디오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사들이고 있다. 나치는 유럽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고, 오늘은 노르웨이를 진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독일군이 파리로 한발 가까워져 올 수록 나의 마음은 미술품으로 한 발 더 뻗어 나간다.


막스와 분주하게 움직인 덕에 점심시간 즈음에 입체파로 유명한 작가, 페르낭 레제의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 아, 저 그림!’


내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는 작품이 있었다. 가격은 800프랑 남짓이었다.


페르낭 레제, Man in the City 1919


‘이 좋은 그림이 800프랑밖에 하지 않는다고..?’


 세월이 꼭 안목을 담보하지 않는 것이 예술의 세계이지만, 나는 20년 동안 미술에 관심을 가져왔고  절대 이 가격에 페르낭의 작품을 살 수 없다는 것 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스튜디오의 주인이자 작품의 작가인 페르낭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 정말, 이 가격에 팔 건가요? 당신 작품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고 있죠?


“ 하하. 극찬이네요. 당연히 제 피와 살 같은 작품이지만.. 전쟁이 불어닥치고 있는 이 상황에서 그렸던 작품을 모두 다 들고 움직일 순 없어요. 마담이 구매해준다면 조금 더 가격을 낮춰드릴 수도 있어요.


가격을 낮춰주겠다는 그의 제안은 거절하고, 제값에 그의 작품을 사 왔다. 막스와 함께 잠시 머무는 파리의 집은 요즘 이렇게 우리가 매일같이 사들이는 작품으로 채워지고 있다. 독일군의 파리 입성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어 사람들은 속속들이 피난을 떠나고 있고, 애지중지하던 그림을 미술시장에 내놓고 있다. 그뿐일까? 사설 미술관들조차  소장품을 처분하고 있어 최근 주가가 높아졌던 피카소나 마그리트, 미로의 그림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온다. 이런 소식을 매일같이 접하다 보면 마음이 급해져 작품들을 사 모으기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 후… 막스, 이 작품들을 모두 가지고 움직일 수 있을까요? 살 수 있는 건 모두 사들이고 있지만, 가끔은 겁이 나네요.


막스는 부드러운 손길로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페기, 난 심지어 독일인이잖아. 내 정체가 들통나면 언제든 독일군에 체포되어 수용소 살이를 할 수 있는 처지야.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마음을 졸이며 살고 싶진 않아. 페기도 일어나지 않은 일에 앞서 너무 걱정하지 마.



그렇다.


프랑스에서 처음 만난 후, 내 열렬한 구애를 받아들여 함께 있는 이 금발의 초현실주의 그림 작가, 막스 에른스트는 독일 출신이다. 신분을 속인 채 프랑스에 체류하고 있는 그는 벌어지지 않은 일에 마음을 많이 쓰지 않는다고 내게 말하곤 하지만 가끔 전쟁에 대한 불안함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보인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체의 적국, 독일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보니 그의 불안함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 앞에서 미국 출신에 재력이 충만한 나의 걱정은 배부른 소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는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 콘스탄틴 아저씨 


여러 날이 지났다.


이제 독일군이 정말 파리의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는 그간 미술시장에 꾸준히 나오는 유명 작가들의 작품 구매를 멈추지 않았고, 오늘은 오랜 친분이 있던 콘스탄틴 아저씨의 작품을 사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스튜디오에 도착하니 아저씨가 나를 반겨주셨다.


“ 잘 지내셨어요?


“ 이제 정말 히틀러가 파리까지 넘어올 것 같아. 안정된 곳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싶은 마음만 들어.


“ 저도 고민이 많아요. 아저씨는 파리를 떠날 생각인가요?


“ 응, 이것들을 모두 들고 움직일 순 없으니 당분간 작품 정리를 마저 하고 조용한 곳으로 잠시 떠나있을 거야. 하지만 파리를 아예 떠날 순 없을 것 같아.


“ 최근에 완성하셨다는 작품을 볼 수 있을까요?

콘스탄틴 브란쿠시, Bird in Space 1932-40


 콘스탄틴 아저씨의 작품 이름은 ‘새'였다. 불현듯, 깃털과 새가 비상하는 모습에 집중한 이 그림이 그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어느 공간(space)으로 날아가야 할까… ?’



이러한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것만으로도 아저씨의 작품은 훌륭했기에 자리에서 바로 금액을 지불하고, 내일 인부들이 작품을 우리 집으로 옮기기로 했다.


“ 아저씨, 우리 꼭 다시 이 작품 앞에서 만나요.


“ 그래, 잘 지내고 있으렴. 전쟁이 지나가면 꼭 만나자, 우린 그럴 수 있을 거야.




# 가자, 뉴욕으로 


그 후로 1년이 지났다.


콘스탄틴 아저씨의 작품을 구매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했다. 나는 턱 끝까지 다가온 위협에 막스와 함께 프랑스 남쪽 작은 시골 마을에 내려왔다. 난 당장이라도 미국으로 떠날 수 있었지만, 후대에도 길이 기억될 이 작품들을, 그리고 이 작품들을 만들어 낸 작가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프랑스를 쉽게 떠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떠나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지난겨울, 나는 그림들을 사고 남은 돈 중 50만 프랑을 비상구조위원회에 기부해 일부 작가들을 도와 미국으로의 탈출을 계획했다. 최근에는 유통업자를 통해 여태까지 사들인 작품들을 매트리스 사이에 넣고, 이불로 꽁꽁 싸매 뉴욕으로 먼저 보냈다.


‘전쟁통에 배가 침몰하기라도 하면, 누군가 그 이불 사이를 들춰보기라도 하면 어쩌지?’


아찔한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뉴욕행 배에 막스를 비롯해 샤갈과 이브 탕기, 그리고 여러 친구들과 함께 몸을 실었다.

우리는 전쟁의 중심인 유럽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에 때로는 웃으며 앞으로의 희망찬 나날을 이야기했지만, 두려움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막스는 배를 타기 수일 전, 프랑스에 협력했다는 죄명으로 독일군에 체포 직전이기도 했다. 두려움은 한 순간에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아마 미국에 입국하는 그 순간까지도  두려울 것이다.


나의 두려움은 미리 보낸 작품들을 풀어 보기까지 계속되겠지?

그래도 그 모든 것이 지나면.. 나는 결국엔 이룰 것이다.

그 모든 작품을 가지고, 유럽에서 이루지 못했던 꿈. 미술관을 개관할 것이다.

그리고  콘스탄틴 아저씨와의 마지막 약속처럼 그의 작품 앞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한다.

1941년, 뉴욕 입국 당시의 막스 에른스트와 페기 구겐하임 



⋇ 위 글은 페기 구겐하임의 삶을 소재로 재구성한 픽션입니다.

⋇ KUA about


뉴욕의 부유한 구겐하임 가문에서 태어난 마거릿 페기 구겐하임 (Peggy Guggenheim, 1898-1979) 은 1919년 그녀가 21살이 되든 해, 타이태닉호의 침몰로 배에 승선 중이던 아버지 벤저민 구겐하임을 잃고 당시 250만 달러 (2020년 기준 3700만 달러)의 유산을 상속받습니다.  


    1920년, 천문학적인 금액을 유산으로 상속받은 그녀는 일하지 않아도 됐음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이던 가문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뉴욕 맨해튼 미드타운에 있는 서점에서 처음으로 일을 하며, 당시 만난 서점의 주인이자 조각가의 부인인 마리 클라크 (Mary Clarke)를 만나 예술에 눈을 뜨게 됩니다.  


    1920년 말에는 더욱 큰 예술세계를 탐험하기 위해 페기는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고, 마를 셸 뒤샹(Marchel Duchamp), 맨 레이 (Man Ray) 등 유명 예술 작가들과 친분을 쌓으며 예술의 견문을 넓혀가게 됩니다.  


    영국에서 구겐하임 죈느 (Guggenheim Jeune : 젊은 구겐하임 ) 갤러리를 오픈하고 활발하게 예술품을 전시하는 일에 몰두했던 그녀지만, 갤러리를 운영하며 손해를 보기도 해 그녀는 구겐하임 죈느의 운영을 1939년 중단하기로 합니다.  


    그녀는 첫 갤러리의 운영을 중단하였지만, 그녀는 더 큰 꿈 - 런던에 현대 미술관을 건립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녀는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런던을 떠나 파리에서 박물관에 전시할 미술품을 모으고자 돌아왔는데, 직후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전쟁으로 인해 그녀의 런던 미술관 건립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당시 구매하고자 했던 모든 화가의 그림을 구입하기로 마음먹고 이를 실행하게 됩니다. 그녀는 하루에 한 개의 그림 작품을 사는데 몰두합니다.  


    그녀는 이 당시 초현실주의작품으로 명성을 떨치던 막스 에른스트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40점의 에른스트 작품을 비롯해 1939년 9월부터 1940년 4월까지 10점의 피카소의 작품, 8점의 미로, 4점의 마그리트, 4점의 페레스, 3점의 맨 레이와 달리, 1점의 샤갈 작품 외 다수의 작품을 구매합니다.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한 1940년 8월 이후, 그녀는 막스와 함께 프랑스 남부로 내려갔으며 이때 50만 프랑을 기부해 유럽을 탈출하고자 하는 작가들을 도와 1941년 7월 뉴욕으로 떠납니다.  


    그녀는 이듬해에 프랑스에서 모은 작품들을 토대로 뉴욕 맨해튼에 ‘금세기 화랑'을 열었고 개관 당일에는 수백 명의 인파가 모였습니다. 이후 이 갤러리는 유럽에서 피난 온 미술가들의 전시를 이어 갑니다.  

1942년 금세기 화랑을 열었을 당시, 마그리트, 페링턴, 미로의 그림 앞에서 앉아있는 페기 구겐하임

 



1942년, 페기 구겐하임과 당대의 작가들 
막스에른스트와 페기 구겐하임



작가의 이전글 [장터가는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