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A Conte #18 : 토니 샤프라치와 아티스트
“ 여어- 미스터 바스키아! 잘 지냈어?
뉴욕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소개받은 젊은 흑인 친구, 바스키아의 집을 잠시 들렀다. 나와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데도 불구하고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머리를 식힐 겸 이스트빌리지 거리를 산책할 때면 가끔 이곳을 들른다.
“ 아, 토니!!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요! 잘 지냈나요? 갤러리는 잘 돼가고 있어요?
불쑥 찾아왔는데도 바스키아는 언제나 맑은 얼굴로 나를 반겨준다.
“ 응, 소호에 정식으로 자리를 잡았어. 프린스 거리 역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지.
나는 요즘 따라 더 고민이 가득한 갤러리 이야기를 떠드는 것 보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벽에 비스듬히 세워진 그림으로 화제를 돌렸다.
“ 그나저나 이 그림은 이번에 새로 그린 거야?
해골과 같이 상징적인 형상, 다양한 색, 알 듯한 문자들이 뒤섞인, 어린아이가 그린듯하지만 실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그의 작품은 언제나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 아, 이거. 최근에 그린 그림이에요. 백인 경찰들은 아직도 흑인을 노예에 가깝게 취급하는 것 같아요. 별일 아닌 것들로 ‘흑인이라서 그렇다’는 프레임을 씌우죠. 근데 그런 취급을 받는 ‘흑인’이 ‘경찰관’이 된다면 참 아이러니하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떠다녀서 그려봤어요.
이 젊은 청년은 자신의 인종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많은 사회적 고민과 생각들을 그림으로 표출해낸다. 그러면서도 별거 아니란 듯 편안하게 말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감탄이 튀어나올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나는 고향에서 그만둬야 했던 갤러리 운영을 소호에서 다시 시작하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소호나 첼시의 갤러리에 휘황찬란한 조명을 받으며 높은 값어치를 뽐내는 그림들과 콧대 높은 작가들을 보다 보면 어딘가 공허해지고는 한다. 그럴 땐 이렇게 밝은 햇살 아래 걸려있는 그림들과 이를 그린 이들의 생각을 듣는, 그러니까 지금 바스키아를 만나는 것과 같은 시간으로 공허함을 채워나간다.
이란에서 미술과 함께 하는 삶을 모조리 도둑맞고 쫓기듯 온 곳이지만, 뉴욕이 내 평생의 터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바스키아처럼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가들이 도시 곳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아! 바스키아.혹시 여기 지하철 역사 광고판에 그려진 그라피티를 알고 있어? 여기 지하철역 뿐만 아니라 내가 가는 역이면 역마다 그런 그라피티가 잔뜩 그려져 있더라니까?
“ 하하! 알다마다요. 키스 작품이에요! 정말 독특한 녀석이라니까요? SVA 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녀석인데 광고판에 그림을 그리는 건 불법이라 경찰에 잡혀가기까지 하면서도 빈 광고판에 그림 그리는 걸 멈추지 않더라고요. 정말 괴짜예요!
“ 그래? 잘 아는 친구야?
“ 네, 한 2년 전쯤 다른 친구 소개로 만났어요. 저와는 다르게 미술을 제대로 공부한 녀석이죠. 그 녀석과 그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뉴욕의 쥐들은 다 모여 사는 듯한 퀴퀴한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딱히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요즘은 역사 안 빈 광고판 위에 그려져 있는, 방금 바스키아에게 물어본 그라피티 그림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해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길이 조금씩 즐거워지고 있었다.
까맣게 칠해진 빈 광고판 위 하얀 분필로 무심하게, 그렇지만 온 힘을 다해 그린 것 같은 그라피티를 처음 봤을 땐 ‘어떤 사람이 그린 걸까?’라는 단순한 의문이 들었었다. 하지만 내가 가는 지하철역 마다 다른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갤러리에 저런 그림을 건다면 어떤 느낌일까?’라는 생각이 들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그림들을 그린 이가 바스키아의 친구라니!
“ 바스키아, 혹시 내가 그를 만날 수 있을까?
“ 당연하죠! 아마 토니도 키스를 만나 이야기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실 거예요!
며칠 뒤 나는 바스키아의 소개로 베일에 싸여있던 지하철역의 아티스트를 만나게 되었다.
“ 안녕하세요, 키스 해링입니다.
“ 오, 드디어 만나는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토니 샤프라치예요.
키스는 깡마른 체구에 안경을 쓴, ‘전형적인 너드의 표본이다!’ 하면 누구도 반박 못 할 외모의 젊은이였다. 키스를 소개해준 바스키아는 일이 있어 먼저 자리를 일어난다며 떠났고, 둘만 남은 우리는 맥주를 한 잔씩 마시며 대화를 시작했다.
“ 지하철역에 그림을 그린 사람이 누군지 너무 궁금했는데 마침 바스키아와 친구라고 하더군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당신을 소개해달라고 했어요.
“ 오, 제 그림을 보셨군요! 지하철역 갤러리 관객이 여기계셨다니!!
“ 하하하 - 그렇네요. 당신의 그림이 걸린 지하철역이 바로 갤러리죠! 그런데 왜 지하철역 광고판에 그림을 그리나요?
“음… 처음에 지하철역에서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 것은 충동에 가까운 일이었어요. 덩그러니 남은 그 까만 빈 광고판을 보자마자 내 그림을 아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수 있는 곳 이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죠! 그 생각을 하고는 곧바로 문구점에서 하얀 분필을 사서 광고판 위에 그림 그리기 시작한 것 같아요.
“ 아, 광고판에 마치 코카콜라의 광고가 붙여지듯, 본인의 그림을 ‘광고’한 것일 수도 있겠네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귀찮을 법한 내 질문들에 답을 이어나갔다.
“ 어느 부분은 맞아요.전 제 그림을 알아주는 관객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지하철역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단순히 나와 내 그림을 알리는 의미만 있진 않아요. 관객들이 공감해주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림을 보여주고 싶었어요.지하철역은 어린아이부터 나이 든 사람들까지, 다양한 인종, 다양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 지나치는 곳이잖아요.그 사람들의 전부는 아니어도 대부분이 제 그림의 메시지를 이해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 오. 나도 그중 하나겠네요. 그런데 지하철역에서만 그림을 선보이고 싶은 거예요? 정식으로 갤러리에 당신의 그림을 걸 생각은 없는지 궁금해요.
“지하철역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멈출 생각은 당장 없어요. 뭐랄까..? 제가 해야 하는 일 같더라고요.
“경찰관에게 매번 딱지를 끊고, 수갑을 차도 말이죠? 하하
“ 맞아요. 하도 많이 그림을 그리니까 경찰들도 이젠 그러려니 할 법도 한데 매번 저한테 벌금 딱지를 주더군요. 좀 봐주지 말이에요.. 흐흐.
그는 익살스러운 표정과 말투로 경찰관에게 붙잡힌 이야기를 풀어놨다. 하루에 40개가 넘는 그림을 지하철역에 그리기도 했다는 그의 삶은 듣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했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다른 생각이 떠오른 듯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전환했다.
“ 그나저나 말씀하신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는 것은 늘 바라온 일이긴 하죠. 전 지하철역에 있는 제 그림의 관객이 누군지 모르니까 더 그런 것 같아요. 누가 내 그림에 관심을 가지는지, 그렇게 관심을 끈 그림이 어떻게 그들에게 다가가는지 너무 궁금하거든요. 그 관객이 한 명뿐일지라도.. 아!! 아저씨가 있으니 둘은 넘겠네요?! 하여튼, 그 관객이 소수라 할지라도 저는 그들을 만나보고 싶어요. 그런 자리는 제 이름을 건 전시를 해야 마련할 수 있겠죠.
“ 그럼.. 소호에 있는 내 갤러리에 당신의 그림을 걸어볼래요? 그 공간을 내 드릴 테니, 당신이 원하는 메시지들을 맘껏 그려서 내놓아보는 건 어때요?
맥주 때문인지 조금은 풀려있던 키스의 눈이 (원래 그렇게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 번뜩 떠짐을 느꼈다. 안경 너머 동그란 눈이 나를 향하며 조금은 격앙된 목소리로 그가 대답했다.
“ 정말요? 첫 갤러리 전시라니.. 지금 꿈인가요? 저 맥주 한 잔에 취한 건 아니죠?
“ 하하하. 아니, 아니. 아니에요. 지금 이건 진짜라고요.
6년 전, 뉴욕현대미술관에 전시된 피카소의 ‘게르니카’ 작품에 붉은 스프레이로 글씨를 써 내려간 때가 기억난다. 당시 베트남 전쟁에서 대학살을 일으킨 미군 장교가 사면된 것이 무척 화가 나 학살을 보여준 대표적인 예술작품인 게르니카를 통해 내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 다시 돌아온 이곳, 뉴욕에서 갤러리를 열 때 나는 나만의 메시지가 아닌 갤러리를 통해 다른 이들의 메시지를 드넓게 전달하는 사람이 되고자 다짐했다.
하지만 그 다짐에 있던 ‘다른 이’ 들이 누구여야 할지 너무 막막했고, 갤러리 운영에 대한 고민은 더 깊어졌었다.
이제 알 것 같다.
내가 뉴욕에서 갤러리를 오픈하며 새긴 다짐 속의 ‘다른 이’들이 누구여야 할지 말이다.
⋇ 위 글은 뉴욕에서 유명한 갤러리 오너이자 아트딜러인 토니 샤프라지와 그가 만난 장 미셸 바스키아, 키스 해링과의 관계를 소재로 재구성한 픽션입니다.
⋇ KUA about
토니 샤프라치 (1943년 5월 8일~ )은 이란 태생으로 어릴 적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여 영국에서 미술 교육을 받습니다.
그는 1965년 미국 여행을 하며 뉴욕을 처음 방문하고, 이 여행에서 로이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 그리고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상인 레오 카스텔리를 만납니다. 196년에 뉴욕으로 이사한 그는 뉴욕에 있는 School of Visual Arts를 포함한 대학에서 미술 강사로 일을 하게 됩니다.
1974년 2월, 샤프라치는 뉴욕 현대미술관에 걸려있던 피카소의 1937년 그림, 게르니카에 Kill Lies All이라는 글을 붉은색 스프레이로 칠합니다. 이 행동은 베트남 전쟁 중 미라이 대학살로 재판을 받은 유일한 미군 장교인 윌리엄 캐리를 닉슨 대통령이 사면한 것에 대한 반대 운동이었습니다. 스프레이는 쉽게 제거되었고 게르니카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1977년 이란으로 돌아가 현대 미술관에서 예술 관련 일을 하며 갤러리를 오픈했지만, 이듬해에 이란에서 혁명이 발생하게 되면서 기존 정권과 관계를 맺었던 샤프라치는 갤러리를 닫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와 그의 가족들은 뉴욕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그는 1979년 뉴욕에 갤러리를 오픈하였고, 이전부터 알고 지낸 뉴욕 최고의 미술상 레오 카스텔리의 도움을 받아 많은 아티스트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갤러리가 새로운 목소리와 새로운 재능이 등장하여 기존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으며, 갤러리를 오픈한지 1~2년 안에 키스 해링 (Keith Haring), 장 미쉘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도널드 배슐러 (Donald Baechler), 케니 샤프 (Kenny Scharf), 제임스 브라운 (James Brown), 로니 쿠트론 (Ronnie Cutrone) 과같이 당시 유명해지기 시작한 예술가들과 함께 갤러리 전시, 미술 거래 일을 진행합니다.
키스 해링은 1982년 토니 샤프라지 갤러리를 통해 첫 전시를 열었으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예술가로서의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장미셸 바스키아와 키스 해링은 1978년에 처음 만나 바스키아가 헤로인 중독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막역한 친구 사이로 지내며 예술을 교류하던 사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