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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들렌 Sep 19. 2023

왜?라고 물으신다면

 띠-딩! 맑은 소리와 함께 문자가 왔다. ‘마켓컬리 7,000원 쿠폰 발급’과 ‘어글리어스의 채소 확정을 요구’하는 내용의 문자. 장 볼 때가 됐다는 걸 깨닫고 두 어플에 접속해 채워둔 장바구니를 비운다. 비건식품이 비교적 다양한 마켓컬리는 내가 자주 이용하는 온라인 쇼핑몰이다. 구매하는 건 주로 비건만두, 식물성주먹밥, 비건핫도그, 비건라면, 비건베이글 같은 ‘식물성냉동간편식품’.

 채소는 즐겨 듣는 팟캐스트 <비혼세>에서 추천받은 뒤로 ‘어글리어스’에서 2주마다 정기배송을 받고 있다. ‘품질은 똑같지만 각각의 사연으로 판로를 잃은 친환경 농산물을 불필요한 유통과정을 줄여 발송 직전 수확해 배송한다’는 기업의 훌륭한 철학과 가치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그것 말고도 장점이 아주 많아서 지금까지 애용하고 있다.


 터치 몇 번으로 손쉽게 장을 보고, 냉장고와 냉동실을 가득 채워도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남아 있다. 삼시 세끼 내 입에 무엇을 넣어줄 것인가를 매일같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 요리와 나 사이에는 아주 먼 거리감이 존재하는데 아무래도 우린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영양소 분배를 고려하는 것에서부터 식재료의 유통기한을 생각하고, 그때그때 당기는 음식과 조리법을 배합하여 매일 두 번 이상의 요리를 행하는 일련의 과정에는 순발력, 재치, 체력 이 세 가지가 골고루 필요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그 모두가 나에겐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며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겨야 하는 식생활에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는 걸 독립하기 전에는 잘 몰랐다. 타인(주로 할머니와 엄마)이 차려준 밥상에 수저만 얹으면 되는 삶만 살아온 내가 스스로 밥상을 차려서 수저까지 얹어야 하는 삶으로 진입했을 때 매일 마주해야 했던 충격과 절망의 연속이란. 비건을 지향하겠다는 결심까지 하고나선 하루하루가 해결해야 할 난제로 가득해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어느덧 자취생활 4년 차, 어설픈 경력직이 된 나는 최소한의 품만 들이면서도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식사 루틴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나 같은 인간에게 빛과 소금이 되어주는 다양한 비건제품과 여러 시행착오를 겪은 덕분에 지금은 정해진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식사를 챙긴다. 아침과 저녁은 최대한 간편하게, 점심은 조금 더 요리에 신경 쓰는 방식으로. 있어 보이게 말했지만 과일과 볶음밥(or 비빔밥)이 주식이라는 뜻이다.


 ‘1인 1견 가구’의 집에서 비거니즘을 실천하기란 그리 까다롭지 않은 일이다. 모든 선택의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것이라곤 나 하나뿐이므로. 문제는 집 밖에서다. 약속이 있거나 사정이 생겨서 외식을 해야 할 때. 그럴 때 나는 무엇을 먹어야 하나. 아니, 무엇을 먹을 수 있나.

 혼자 먹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비건식당에 간다거나 동물성 식재료를 뺀 김밥이나 빵, 아니면 한 패스트푸드점의 비건 햄버거 중에서 고르면 된다. 많지는 않더라도 선택지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일행이 있을 땐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비건이 아닌 음식을 먹기도 한다. 그럴 땐 되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식사를 즐긴다.

 애초에 약속이 많지도 않거니와(밖에서 외식할 일이 한 달에 한두 번쯤? 된다.) 완전무결한 비거니즘을 추구하겠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면 만날 수 있는 관계가 줄어들게 되고, 엄격한 자기검열에 지쳐 스스로 나가떨어지기 십상이다.(맞다. 경험담이다.) ‘완벽한 비건’이 될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으나, 타협해야 하는 순간이 드문드문 찾아오더라도 느슨하게나마 ‘비건 지향인’으로 살아가고 싶다. 완벽한 인간은 될 수 없어도 노력하는 인간은 누구나 될 수 있으니까. 나는 노력하는 일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다.


 언젠가 지인이 내게 물었다. “대단하다. 어떻게 그렇게 살아? 나는 하루라도 고기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 그런 생활은 꿈도 못 꾸는데.” 그의 뒷말이 마치 문제적인 사회 구조에 앞으로도 자신은 성실히 가담하겠다는 말처럼 들려 묘하게 거슬렸지만 상대에게 악의가 없다는 걸 알기도 했고, 그간 아는 게 거의 없는 사람들과의 말싸움에 넌더리가 난 터라 질문에 대한 답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내가 비건을 지향하게 된 이유 말이다.

 떠오르는 계기는 많았다. 거대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민낯을 직시하게 된 순간들. 가장 먼저 공장식 축산의 폭력성을 알아 버렸고,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비인간 존재를 착취하는 시스템에 의문을 품게 되었으며, 거기에 더 이상 일조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자연스레 생겨났다. 공장식 축산이 기후 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지구의 모든 존재에게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모든 게 과잉인 인간의 생활방식에 대한 환멸을 느낀지도 오래였다. 

 뚜렷한 해결책이 있는데 달라지지 않는 건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 여기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나는 이 세상이 인간의 잔인함과 이기심으로 만들어졌다는 진실을 더는 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집단에 내가 속해 있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인간이길 포기하고 싶을 만큼. 내가 할 수 있는 건 덜 부끄러운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고, 달리 말하면 그건 비건을 지향하는 일이었다.

 이 수많은 이야기를 입안에서 굴려보다가 나는 답했다. “음… 많은 걸 알게 됐으니까. 알아버린 이상 외면할 수 없어서?” 왜인지 내 대답에 지인은 더 깊게 묻지 않았고, 우린 다른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다가 헤어졌다. 그때 내 대답 속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는 걸 지인은 알았을까? 그에게도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올까? 


 바야흐로 기후 재난의 시대. 요즘같이 덥다 못해 뜨거운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냉장고에서 오이를 꺼낸다. 초록색을 가진 오이. 시원하고 수분이 가득해서 자꾸 먹고 싶은 오이. 호불호가 강하다지만 나에게는 비빔면, 콩국수, 샌드위치 등 어디에나 잘 어울리는 오이. 오늘은 아침으로 ‘오이 비빔밥’을 먹었다. 전자레인지에 돌린 식물성 참치주먹밥과 잘게 썬 오이를 한 그릇에 담고서 간장, 올리고당, 참기름, 식물성 마요네즈를 기호에 맞게 뿌려주면 완성!

 우리 집 강아지 오복이는 내가 오이, 사과, 양배추, 당근 같은 단단한 야채나 과일을 도마 위에 얹고 칼로 한 번 슥- 자를라치면 방에서 깊게 자다가도 부리나케 달려 나온다. 최대한 조용히, 몰래 한다고 하는데도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어김없이 오복이가 내 옆에 와 있다. 반짝이는 눈빛을 하고서. ‘그거 나도 줄 거지?’ 하는 표정으로. 갈수록 암울해지는 세상 속에서 점점 표정을 잃어가는 나라도 그 순간만큼은 방싯 웃게 된다.

 ‘오복아 넌 정말 귀신같이 알아차리는구나! 역시 대단해! 좀 나눠 줄까?’ 어떤 문장이든 끝음절을 올려 말하면 고개를 갸우뚱하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오복이.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소리만 듣고도 알아차리는 나의 강아지에게 잘게 조각낸 오이를 건넨다. 강아지의 입속에서 오이 조각이 굴러다닌다. 아삭아삭 경쾌한 소리로 씹힌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 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와 너, 그리고 어딘가에서 애쓰고 있을 당신들에 대해서. 우리 모두의 살아 있음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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