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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들렌 Jun 15. 2024

차갑고 달큰한 여름의 맛

     찾아보려면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손가락 몇 번 두들기는 것만으로도 굳이 알고 싶지 않은 누군가의 사삿일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시대니까. 조금만 뒤적이다 보면 금세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SNS를 하지 않는 극소수의 사람 중 하나가 너일지라도,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다. 퐁당퐁당 돌다리 건너듯 가까스로 이어져 있는 공통 지인을 거치다 보면 네 소식에 닿는 게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한다. 동의 없이 불쑥 파헤치는 건 너무 일방적이지 않은가 하고. 아무리 타인의 삶을 염탐하는 것이 현대인의 보편화된 일상이라지만, 나 또한 조금의 거리낌 없이 그 흐름에 일조하고 있음을 자각할 때면 소름이 끼치곤 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낭만이 없다. 무릇 관계란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여야만 한다는 고지식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내가, ‘낭살낭죽(낭만에 살고 낭만에 죽는)’ 습성을 여태껏 버리지 못한 내가 가벼운 방식으로 인연을 다룰 리 없다. 작은 추억이라도 깃든 인연이라면 더더욱. 함부로 붙였다 뗐다 하는, 벽에 붙인 사진엽서 같은 게 아니었으면 해서. 한 시절을 건져 올려 소상히 들여다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마음이 있다.


     G를 알게 된 건 17살. 다른 학교에 소속되어 있던 우리가 이제부터 한 소속이라는 표식으로 같은 교복을 입고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여 앉기로 했을 때. 존재감을 표출하고 싶어 안달인 아이들의 떠들썩함과 튀지 않기 위해서라면 숨소리도 내지 않는 아이들의 정적이 공존했던 교실에 나도, G도 있었다. 교복, 책걸상, 사물함, 반복되는 시간표 등 모든 게 천편일률적인 학교에서 학생들의 시선이 가장 많이 쏠리는 곳은 얼굴들. 이제 막 입학한 아이들은 다 다른 생김새를 가진 또래의 얼굴을 통해 첫인상을 결정했고, 마음 내줄 친구를 찾느라 분주했다.


     G가 내 시야에 제대로 들어온 건 설렘과 긴장으로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차츰 안정되어 갈 때쯤이었다. G는 분명히 눈에 띄는 애는 아니었다. 조용하고, 성실하고, 선생님 말씀 잘 따르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 G와 어울리는 친구들도 모두 비슷했다. 누구도 G와 나를 친구로 보지 않았다. 내 주변에는 언제나 공부보다 자신을 드러내는 게 더 우선인 친구들이 있었으므로. 나 또한 스스로를 드러내는 건 달갑지 않았지만, 공부보다 자신에게 더 관심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 어쨌든 나는 친한 정도와는 상관없이 반 친구들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잘 걸었는데 나와 대화할 때 G의 얼굴이 자주 붉어졌던 걸 기억한다. 내가 말을 붙이면 G는 길지 않게 답하고. 그걸 몇 차례 반복하고. 그러다 학년이 바뀌면서 반이 나뉘고. 그래도 가끔 지나가다 G를 만나면 잊지 않고 인사를 건넸다.


     우린 결코 허물없이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다만, 왜인지 G가 틈틈이 나를 살피던 시기가 있었을 뿐이다. 가령 급식을 거르고 책상에 자주 엎드려 있던 날들. 인기척에 고개를 들면 책상 위에 놓인 사과잼쿠키와 과일주스팩, 앞에 앉은 G의 너른 등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내가 혼자 있을 때면 G가 소리 없이 곁에 다가와 있기도 했다. 어쩐지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땐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게 누군가를 계속 주시하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란 걸 그때는 몰랐다.


     모든 것에 지쳐있던 시기라서였을까. 주입식 교육만 강요하는 학교생활에도 도무지 적응하지 못했으며 관계에 대한 회의감으로 모두에게 싫증이 났다. 성숙한 사람과 대화하고 싶다는 열망이 커질수록 또래들에겐 점점 더 시큰둥해졌다. 산다는 건 무엇이며, 왜 우리는 부조리를 깨닫고도 순응해야 하는가. 삶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저만의 답을 찾아가는 데에 골몰할 줄 아는 진정 어른스러운 인간을 만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오늘 급식 뭐 나오냐? 이따 매점 갈래? 피방 고? 같은 시시껄렁한 말만 뇌까리는 애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정말이지 신물이 났다. 나라고 그다지 다를 것도 없었을 테지만… 그때는 그랬다. G의 다정함도 다른 친구들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축구공처럼 세상을 뻥뻥 다 차버리고만 싶었다.


     G와 마주 앉아 빙수를 먹었던 카페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빙수 먹으러 가자. 무심코 던진 말에 선뜻 좋다고 답했던 G. 찜통더위에 흘린 구슬땀을 식히자고 에어컨 바로 앞자리에 앉았던 한여름의 오후. 치아에 찌릿한 전기가 통할 만큼 차가운 얼음, 딸기와 초코, 생크림, 꾸덕한 아이스크림으로 뒤덮인 빙수를 호화롭게 떠먹었던 날. 나 처음으로 학원 빠져봤어, 말하며 두 뺨과 귀를 선홍빛으로 물들였던 너는 왜 샅샅이 내게 다정하기만 했는지. 쉽게 홍조를 띠는 이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요컨대 그들은 속마음을 쉽게 들키는 사람. 그들의 해파리 같은 투명함에서 나는 차갑고 달큰한 여름의 맛을 떠올린다.


     G, 너는 나를 아주 잊어버렸을까? 아니면, 이따금씩 떠올리기도 할까? 언젠가 우연히 G를 만난다면 말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득 네가 떠올라 백지에 까만 글자로 우리 이야기를 빼곡히 늘어놓은 날이 있었다고. 그때도 G의 붉게 물든 두 뺨과 귀를 볼 수 있을까. 그 애의 투명한 마음을 다시 한번 보게 되는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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