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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들렌 Jun 22. 2024

때때로 꽃말은 일기가 되고, 내가 되어


아무리 긍정을 닥닥 긁어모아도 삶이 형벌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다. 마치 오늘처럼. 눈을 뜨면서부터 직감한다. 망쳐 버릴 오늘 하루를. 우선 눈꺼풀의 무게부터 다르다. 내가 들어 올린 게 눈꺼풀인지 돌덩이인지 분간되지 않는다. 자는 사이에 누가 바위로 내 몸을 짓눌렀다 간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몸이 이렇게까지 천근만근일 리가. 삶을 짊어진 몸을 간신히 일으켜 씻긴다. 부랴부랴 강아지와 아침 산책을 나선다. 어제는 피고 지는 모습이 갸륵하다며 조밀하게 눈에 담았던 치자꽃을, 오늘은 이렇게 빨리 시들어 버릴 거 왜 피는 거냐고 면박을 준다. 재채기처럼 터지는 분노를 제어할 수 없는 아침. 나를 빠르게 스쳐가는 저건 또 뭘까. 오늘 치 활력이다. 손까지 흔들며 아주 달아나 버리는 활력의 뒤꽁무니를 눈으로 좇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 오늘은 정말 망했구나.


잊을만 하면 습관처럼 찾아오는 ‘허무’라는 꼬리표가 온종일 의식과 무의식에 따라붙는다. 아침 햇살부터 내 숨소리까지, 온갖 게 거슬리고 난리다. 밥은 먹어서 뭐하고, 또 돈은  벌어서 뭐 하며, 읽고, 쓰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죽으면 그만인데. 모두 다 부질없다는 회의감에 젖기 시작한다. 어째서 오늘따라, 유독, 하필이면 책상 위에 쌓인 그 많은 책들 중에서 한 책으로만 시선이 꽂히는 걸까. 조지 오웰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를 골똘히 바라보며. 그러게 나는 왜 쓰지? 내가 써온 글, 쓰고 있는 글, 앞으로 쓸 글들. 아무리 생각을 굴려봐도 시답잖은 의미만 떠오를 뿐이고. 종이 끝에 닿은 커피가 서서히 번져가듯, 삽시간에 뇌 전체로 허무주의가 퍼진다. 평소 내가 곡진히 여기는 것들에 대한 생각에까지 닿으니 마침내 절정이 온다. 이런 날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저 꼼짝없이 가루가 되도록 나를 갉아먹을 수밖에. 내가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 알 수 없음이 심장을 쥐어 짠다.


다행스럽게도, 정오의 햇덩이처럼 종일 발광發光하던 우울이 내려앉은 어둠을 따라 서서히 모습을 감춘다. 퇴근 후 나선 밤 산책. 멍하니 흔들리는 개의 꼬리에만 시선을 두며 걷다가 문득, 은은하게 풍겨오는 꽃향기에 고개를 든다. 오늘 아침에 본 치자꽃이 시야에 들어온다. 쥐고 있던 스마트폰으로 치자꽃의 꽃말을 검색한다. ‘순결’, ‘청결’, ‘한없는 즐거움’. 만개한 순백의 치자꽃 옆에서 저물어가는 치자꽃도 한없이 즐거울까. 치자꽃을 즐겨 꽂았다던 재즈가수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도 노래할 때만큼은 한없이 즐거웠을까. 과일도, 식물도. 왜 스러져 가는 많은 것들은 갈색빛을 띠는지. 검은빛을 띤 주홍색. 액정에 비친 내 안색이 갈색처럼 보인다면. 나도 시들어 가는 중인지. 아니, 이미 시들어 버린 건지. 나는 그런 게 궁금하다.


오래된 추억 하나를 끌어당긴다. 데이트를 마치고 귀가하던 밤. 나를 바래다주던 C가 집 앞에서 슬며시 건넨 꽃은 해바라기였다.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뜬금없는 꽃 선물이 당황스럽지 않았던 건 꽃을 준 이가 다름 아닌 C였기 때문에. C는 꽃 말고도 텀블러, 립스틱 등 이것저것 자주 선물해서 내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곤 했다. 나와 만나는 동안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마음을 한껏 보여주던 적극적인 사람.

꽃을 선물받은 날, 집으로 돌아와 화병을 대신할 만한 것을 찾다가 500cc 맥주잔을 꺼냈다. 절반쯤 물을 채우고, 그새 시들해진 해바라기를 포장지에서 조심히 꺼내 잔에 꽂았다. 침대 발치의 선반에 놓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관상했던 해바라기 두 송이. 맥주잔 때문인지 소박해 보였으나 큼지막한 노란 꽃잎 덕분에 볼품없어 보이진 않았다. 잔에 담긴 해바라기가 꼭 C 같았던 기억. C는 정말 나만 보는 애였으니까. 목 빠져라 기다리는 것도 늘 C의 몫이었으니까. 해바라기는 점점 고개를 떨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쓰레기봉투 속에서 구겨졌고, C와의 관계도 오래지 않아 끝이 났다. ‘일편단심’. 당신만을 바라보겠다는 해바라기의 꽃말. 해바라기를 선물한 C. 시든 꽃을 버리고 나서도, C와 헤어지고 나서도 한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해바라기를 생각하면 해바라기를 건네던 하얀 손목부터 떠올리게 되는 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가지각색의 꽃들이 지천에 가득 피어나기 시작하는 계절. 요즘 나는 놀이처럼 꽃말 찾기를 즐긴다. 그렇게 찾은 꽃말 중 어떤 꽃말은 적어둔다. 잊고 싶지 않아서. 그날 하루 중 어딘가에 책갈피처럼 끼워두고 싶어서다. 어느새 수첩엔 꽃말로 수놓은 페이지가 왕왕 쌓였다. 때때로 꽃말은 일기가 되고, 내가 된다.


망종화의 꽃말은 ‘비밀’, ‘반짝반짝’, ‘슬픔을 멈추다.’

자귀꽃의 꽃말은 ‘환희’, ‘가슴이 두근거림’.

어제의 꽃말은 ‘인내 끝에 다가온 결실’.

오늘의 꽃말은 ‘휘몰아치는 마음’.


내일의 꽃말은 무엇으로 기록될까.

                              

                                                                            (202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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