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머리를 말리고 덕지덕지 선크림을 바르는 아침. 거울 속 얼굴에 시선을 둔다. 두드러져 보이는 건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는 무표정함과, 그 여백을 메우려는 듯 더 촘촘해진 주근깨. 아침부터 한숨을 내쉬는 건 우편함에 날아드는 각종 고지서와 줄줄이 빠져나가는 고정지출, 앞으로 추가될 지출 항목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장마철 폭우로 생긴 바닥 곳곳의 물웅덩이처럼 점점 늘어가는 고민거리는 죄다 돈과 관련된 것들뿐이라는 생각. 사고 싶은 책을 고민 없이 집어 들던 습관을 억누른지도, 극장에 가는 대신 구독한 OTT 서비스에 보고 싶은 영화가 올라오기만을 기다리게 된 지도 오래다. 집, 공원, 직장. 이 동선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주에서 꾸리는 일상은 나의 안락한 감옥. 내가 구축한 감옥에서 나는 더 단순해지기 위해 복잡한 나를 지운다. 내일에 대한 기대 없이 오늘을 열고 닫는다.
최근에 본 영화 <리빙: 어떤 인생>(Living)은 30년 동안 런던 시청 공무원으로 살아온 한 남자가 어느 날 시한부를 선고받으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유의미하게 쓰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보다 내 기억에 더 오래 남은 건 영화 속 인물들의 일상이었다. 주인공 윌리엄스(빌 나이)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같은 열차를 타고 집과 직장을 오가는 단조로운 일상을 산다. 그를 둘러싼 환경도 마찬가지인데, 런던 시청 공무원들은 마치 맞물려 있기에 돌아가는 톱니바퀴 같다. 부서는 나뉘어 있지만 하나같이 공통된 업무를 수행한다는 점에서. 들어온 민원을 타부서로 이첩하는 게 그들의 주된 업무(처럼 보인)다. 민원은 해결되지 않고 시곗바늘처럼 끝없이 돌고 도는데 그 누구도 개의치 않는 모습. 그들은 나서서 해결하는 귀찮음보다 부조리한 관습에 순응하는 편리함을 택한다. 똑같은 복장, 심드렁한 표정, 지워진 자의식이 낳은 규격화된 삶을 모범 답안처럼 따르는 인물들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 오늘 아침 거울 속에서 본 얼굴이 화면에 겹친다.
모든 것을 줄 세우는 데에 혈안인 세상에서 개인은 얼마나 쉽게 지워지고 수치화되는가에 대해서 종종 생각한다. 각종 금융 앱은 나를 분석하고 평가한다. 내가 얼마나 평균치에서 가깝거나 벗어난 삶을 살고 있는지를. 걷기 상위 00%, 신용점수 상위 00%, 또 죽 나열된 또래에 비해 부족한 보험 항목들. 나노 단위까지 쪼개서 조목조목 일러주는, 광기에 가까운 친절은 어딘가 소름 끼친다. 나열된 숫자들을 확인한 이상 내 조바심은 밑도 끝도 없이 자라난다.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평균 이하가 되지 않기 위해 서둘러 욕망을 수정한다. 근사치에 가까워지도록 이리저리 스스로를 재단하고 수선하는 데에 정신없이 몰두하다가 문득, 어떤 질문이 고개를 든다. 나 왜 이렇게 살고 있지?
그렇게 패닉은 찾아온다. 내 욕망이 진짜 내 욕망인지, 타인의 욕망을 내 욕망인 양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날. 그때의 나는 그저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나를 놓아 버리고 싶은 충동이나, 빠르게 뛰는 심장을 어떻게 가라앉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떨리는 손을 말아 쥔 채 서둘러 산책을 나섰던 순간만 어렴풋이 떠올랐을 뿐.
최대로 올린 볼륨으로 인해 이어폰을 꽂은 귀까지 둥둥 울렸던 감각과 등을 뜨겁게 달구던 햇볕의 온도에 집중하며 걸었던 기억. 횡단보도를 건너던 순간 나를 스쳤던 남자아이를 기억한다. 붉다 못해 피자두처럼 새빨갛게 익은 얼굴을 하고서 자전거를 꽉 움켜쥐던 번들거리는 손. 아이의 구레나룻을 타고 뚝뚝 흐르던 땀과 회색 아스팔트 위에 남겨진 몇 개의 검은 자국. 삶을 맹렬하게 감각하며 살아내는 이에게선 시큼한 냄새가 난다고, 그날 일기에 적었던가.
이제니 시인은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짧은 것.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가는 삶은 더욱 짧은 것. 그러니 타인의 옷을 입고 타인의 꿈을 꾸고 타인의 인정을 구하려고 애쓰는 대신 제 존재의 타고난 빛을 누리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 무한한 우주 속에서 한낱 보잘것없는 먼지와도 같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 삶이 언제 끝나더라도 슬프거나 아쉽지 않게. 누구도 보지 않는 혼자만의 방에서도 오롯이 자족하면서. 흰 바람벽을 마주 보면서. 응앙응앙 우는 흰 당나귀의 먼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그리하여 어느 날 우리 빛나는 얼굴로 만날 수 있기를.’*
읽던 책을 덮고 노곤한 몸을 침대에 눕힌 밤. 스스로에게 던져온 질문은 잠들 때까지 계속됐다. 나는 나를 잃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잃어버린 줄 알았던 나를 발견할 수 있을까.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나를 되찾을 수 있을까. 더 이상 복잡한 나를 지우려 들지 않을 수 있을까. 내일에 대한 기대로 오늘을 열고 또 닫을 수 있을까. 죽어가는 동시에 살아갈 수 있을까. 죽어가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소멸하는 삶을 끌어안을 수 있을까.
*<새벽과 음악>, 이제니
(202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