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ntwurf Dec 27. 2022

여름을 닮아서

그 아이는 여름을 닮았다.


목이 조금 늘어난 흰 티셔츠, 발목이 조금 드러나는 바지에 흰 양말과 검은 축구화, 사계절 내내 그 아이의 축구화가 닳을 동안 내 마음은 결코 닳아 없어질 줄을 몰랐다. 그 아이를 보고 싶으면 운동장에 갔다. 나는 여름의 뜨거움이 힘들어서 학교 안에서 몰래 보곤 했는데, 넌 어쩜 그리도 뜨거움을 피할 줄 모르는지. 그 아이를 안을 때면 땀에 젖은 축축한 티셔츠가 닿고는 했는데, 꽃밭에 뒹굴었는지 솜사탕으로 샤워를 했는지 꼭 여름날 놀이동산의 향기가 났다.


밤에는 텔레비전 불빛이 새어 들어오는 방 안에서 그 애의 답장을 기다렸다. 마른침을 꼴깍 삼켜가면서 혹여나 심장 뛰는 소리가 방 밖으로 새어나갈까, 한 여름에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는 밤새 그 아이와 같이 있었다. 


한 번은 가족여행을 떠나기 전에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그 애가 멀리서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뛰어왔는지 벌게진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머쓱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왔는지, 나를 어떻게 찾았는지 괜스레 툭툭 내뱉는 내게. 그냥. 그냥 오랫동안 못 보니까. 라는 그 애의 한마디는 땡볕에 줄줄 흘러버린 아이스크림 마냥 나를 완전히 녹여버렸다. 애써 고개를 돌려 빨개진 얼굴을 감추려는데, 눈치도 지지리 없는 너는 사진을 찍자고 했고, 절대 안 된다고, 죽어도 안 된다고 말렸는데, 기어이 그 애는 '다행이다. 보고 싶을 거야.'라며.


어쩌다가 그 애와 마주 앉아서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그리고 흔히 얘기하는 그 연인들의 발장난이라는 걸 했는데, 발과 발이 닿으면 감전이 될 수도 있는 거구나 생각했다. 무언가 나쁜 짓을 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입에서는 자꾸 단내가 났다. 볼이 얼얼해질 정도로 사탕을 오래 물고 있어서 입안이 온통 달콤한 침으로 가득 차는 그런 느낌.


소나기를 피해 놀이터 미끄럼틀 위로 올라간 날, 갑작스레 가까워진 거리 때문인지, 갑작스레 퍼붓는 여름비의 냉기 때문인지, 그날 저녁 내도록 얼굴의 열기가 내릴 줄을 몰랐다. 감기는, 결코 감기 때문은 아니었다. 홑이불을 펑펑 차니 나풀나풀 날아가는 모양새가 꼭 내 마음이었다.


그 애는 싱그럽기보다는 뜨거운, 수영장에 첨벙 뛰어들기보다는 썬베드에 누워서 태양을 마시는, 시원한 슬러시 한 잔보다는 침을 삼키면서 목이 타는, 그늘에 누워 부채질을 하기보다는 얼굴을 따라 땀이 한 방울 주룩 흐르는, 그런 여름을 닮았다.


여름 내도록 까맣게 탄 그 애의 피부는 겨울이 되도록 돌아올 줄 몰랐고, 그 애에 대한 내 마음 역시 겨울이 되도록 옅어질 줄을 몰랐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타버린 피부는 아니고, 겨울이 지나고 봄, 여름이 되어도 당최 옅어질 줄 모르는 내 마음이. 눈이 펑펑 온 다음날 우리는 헤어졌다. 그 애를 사랑하게 된 그 운동장에서. 그 애는 쌓인 눈을 뽀드득 뽀드득 밟으면서 이별을 얘기했다.


어쩌면 여름을 닮은 그 아이와 겨울에 헤어진 건 다행일지도 모른다. 만약 여름이었다면, 그렇다면, 여름을 정말 미워하게 됐을지도 모르니.



작가의 이전글 지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