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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twurf Jun 19. 2023

무제

01.      

딩동♬ 박지후 고객님!

진심을 다하는 롯데택배입니다.

박지후님께서 기다리시던 상품을 가지고 출발합니다.     

■ 보내는 분(곳) : YES24

■ 상품명 : General Anatomy and Musculoskeletal System, 3/E

■ 운송장번호 : 134586462000

■ 배송지 : 서울 마포구 합정동

■ 배송예정시간 : 14~16시     

항상 롯데택배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네럴 아나토미 앤 머스큘로..... 해부학이랑 근골격학..? 이번엔 책이네.” 

문자가 도착하면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먼저, 다이어리를 꺼내 붙어있는 태그를 확인한다. 출근/귀가, 가족, 친구, 식사, 택배, 아이디/비밀번호. 그리고 그중에 ‘택배’ 태그가 붙여진 곳을 펼쳐 적는 것.     

  

‘2월 26일. 주소 동일. 예스24, 해부학/근골격학 도서’     

물론 그 위로 예전부터 적어온 메모들이 있다.


‘2월 20일. 이소정(사촌). 부산시 금정구 장정동. 지마켓. 무드등

‘2월 15일. 새로 이사한 집.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쿠팡. 락스/청소용 솔’

‘1월 21일. 부모님. 대전시 서구 둔산동. 카카오. 안마기’

‘1월 17일. 김태현(고등학교 동창).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무신사. 후드티’

‘12월 30일. 전에 살던 집. 서울시 성북구 안암동. 네이버쇼핑. 방수포/의료용 칼/압박붕대’     


“적지 않으면 까먹어버린다니까,,” 

오늘은 4시에 신촌에서 약속이 있는 날이다. 

집에 돌아올 때쯤에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기필코 결단을 내릴 것이다. 


          

02.      

눈이 펑펑 오는 날이었다. 끊임없는 술게임의 지옥에서 잠시 벗어나 바깥공기라도 쐬려고 나가는데 그만 계단에서 넘어져버렸다. 이미 얼큰하게 취한 탓에 아픈 건 둘째 치고, 온통 슬로우 모션으로 돌아가는 세상이 어지러워 가만히 벤치에 앉아있었다.     


“빨간 물감이 도화지에 한 방울 씩 떨어지는 것 같다.”     


웬 여자애가 벤치 옆에 앉더니 날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내 무릎에서 흐르는 피가 하얀 눈을 빨갛게 적시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지후와는 이날, 그러니까 새터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불문과 지후는 간호학과였는데 단과대가 달랐음에도 새터를 같은 곳으로 오게 되어 음, 운명적으로 만났다고 해야 하나.    

 

지후와의 연애는 뭐랄까, 섹시했다. 지후는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이름도 발음하기 어려운 불란서 할아버지들의 문학을 분석할 때, 지후는 내 몸 이곳저곳을 콕콕 찌르면서 여기는 위팔두갈래근, 여기는 어깨세모근, 여기는 슬개골, 여기는 하악골이야, 하며 웃었다.      


“자기야, 나 소원이 있는데. 우리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절대로 날 잊으면 안돼.”

“응, 좋아. 대신 내 소원도 나중에 들어주기야.”          



03.      

승준이가 날 스토킹했다. 

우리가 헤어진 그날부터 오늘까지, 3개월 내내. 형사 아저씨가 다이어리 하나를 보여줬다. 다이어리에는 온갖 태그가 붙어있었고, 친구라는 태그를 펼쳐보니.     


‘이수경, 1997.03.25., 간호학과 선배, ★☆☆☆☆’

‘박진웅, 1995.08.14., 미팅 애프터상대, ★★★★★, 자꾸 지후한테 술 마시고 전화함’

‘최태민, 1999.05.13., 고등학교친구/동네친구, ★★★★★, 위장남사친임. 집에 들락날락함’

‘김가영, 1999.01.20., 알바, ★★★☆☆, 알바에서 내 욕 함’     


“이승준씨가 박지후씨를 신고했어요. 박지후씨가 누군가를 죽이려고 하는 것 같다면서, 뭔가 심상치 않다고. 그러면서 이 다이어리를 보여주면서 막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나원참. 살인은 무슨. 스토커 주제에. 박지후씨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일단 불렀습니다.”     


“지후야, 일단 화내지마. 나 다 알아. 내가 너 걱정되어서 신고했어. 너 지금 아픈거야. 요즘 힘들어서 그런 생각하는 것 같은데, 괜찮아. 일단 여기 형사님께 다 털어놓고 나랑 같이 병원 가면 돼.”     


오랜만에 본 승준이는 날 보자마자 와락 안으면서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웃음이 나왔다. 내가 죽이려고 했다고? ………… 근데 누구를?            



04.      

꿈을 꾸었나, 술에 취했나. 이리 뒤집어도 빨강, 저리 뒤집어도 빨강, 양면이 새빨간 색종이 조각처럼 기억이 싹둑싹둑 빨갛게 잘려나갔다.     


문과대학 404호 불문과 학생회실.     

토마토스파게티를 티셔츠에 온통 쏟은 채 쓰러져있던 재욱이.     

팔과 다리에 묻은 떡볶이 소스를 보며 울고 있던 병찬이.     

딸기잼이 온통 묻혀 잘린 듯 만 듯 너덜거리는 바게트를 잡고 울부짖던 현수     

새빨간 육회, 물러터진 토마토와 체리, 핫소스.      

온갖 음식물이 섞여서 나는, 처음 맡아보는 그런 냄새가 났다.       


   

05.     

이젠 승준이에게 내 소원을 말할 차례다.     

“자기야, 내 소원은 자기가 지금부터 얌전히, 아주 얌전히 있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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