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ure 시리즈 아홉 번째, 웹툰 [썩은 핑크의 법칙]
* 본 글에는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정. 태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맞이하는 구성원이 아닌가 싶어요. 기본적으로 마주하는 구성원은 엄마와 아빠인 2명이지만 아예 없을 수도, 두 분 중 한 명만 있거나 엄마 2명 혹은 아빠 2명일 수도 있고요. '사회'의 가장 기본이자 기초가 되는 가정은 사람의 일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오죽하면 매너 없고 무례한 사람들에게 "너는 가정에서 교육을 못 받았냐"와 같은 욕설을 내뱉기도 하니(이런 욕이 바른 욕이란 건 아닙니다), 가정의 중요성이 높긴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자아가 생성되는 과정에서 가정에 어떤 불우한 일이 일어나게 된다면, 그리고 거기에서 겪은 트라우마는 과연 우리를 어디까지 따라오게 될까요?
가정에서 받은 상처를 안고 자란 대학생들의 성장을 다룬 웹툰 <썩은 핑크의 법칙>입니다.
머리는 좋지만 나사 하나 빠져 있는 신입생 '배금주'는 '장한울'을 보고 동아리 가입을 결심한다.
하지만 한울이와 가까워질수록 과거의 그림자는 금주의 감정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붙잡기 시작하는데...
순애보단 소유를, 설렘보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추구하는 금주가 정말 원하는 건 무엇일까?
주인공 '배금주'는 교내 흡연실에서 같은 학년의 '장한울'을 마주칩니다. 본의치 않게 한울이의 우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 금주는 한울이에게 왠지 모를 끌림과 '갖고 싶다'는 소유욕을 느끼게 되고, 어쩌다 보니 한울이가 가입하려는 동아리에 따라서 가입해버리고 말아요. 그리고 금주는 대학 생활을 이어가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과 한울이를 통해서 느끼는 감정들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성장합니다. '사람에게 웬 소유..?'라면서 무서운 느낌이 들 수도 있는데, 그런 이상한 성향을 가진 주인공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작품 내 금주는 소위 말하는 '사이다' 캐릭터예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도 안 씁니다. 남들은 하기 어려운 거절도 뚝딱 잘합니다. 가끔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말이 헛나올 때는 당혹감을 보이곤 하지만, 자신이 확고하다고 생각한 부분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말해요. 그리고 그런 금주의 말에는 그다지 틀린 점도 없고요. 자신이 보기에도, 남이 보기에도 아닌 건 아니니까요. 뒤에서 몰래 자신을 평가절하하는 사람들에게 "입에서 똥내난다", "내가 너라면 내가 참 쪽팔릴 것 같은데"와 같이 제대로 한 방을 먹여줍니다.
얼핏 보면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으로도 보이지만, 금주가 이렇게 마음을 닫고 솔로 플레이를 자처하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요. 바로 앞서 이야기한 '가정'에서 받은 슬픔과 상처 때문인데요. 그리고 그건 금주가 한눈에 반했던 한울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부터 시작된 엄마의 부담스러운 기대와 거대한 압박은, 남들이 보기엔 인기인인 한울이에게 언제나 스트레스를 안겨주고 있었고요.
동병상련의 두 사람은 저마다 다른 일이지만 같은 아픔을 지니고 있었고, 자신과 서로의 아픔을 돌아보고 위로해 나갑니다.
이전에 X(트위터)에서 너무 감명 깊게 본 작품이 하나 있었는데요. 바로 [인어공주의 XXX]라는 제목을 가진 단편 만화인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동화 '인어공주'의 클리셰를 비틀고 인어공주가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예요. 그보다 옛날에 재미있게 보았던 <S탐정 앙드레>과 같은 작가분이시더라고요.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반가운 마음이 들었는데, 이 작가분이 현재 네이버웹툰에서 <썩은 핑크의 법칙>(이하 썩핑법)을 연재 중이신 걸 알게 되었고, 단 이틀 만에 정주행을 완료했어요. <썩핑법>에는 정말 주옥같은 명대사들이 많습니다. 작가님께서 작문 학원을 다니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작품 내에서 보이는 대사가 너무 마음에 꽂히더라고요.
<썩핑법>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성인이 되기 이전에 아픔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요. 가족 간에 받은 상처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요.
주인공 금주에게는 ‘도환’이라는 아픈 동생이 한 명 있'었'어요. 경제적으로도 물론 걱정이 없진 않았겠지만, 한 사람의 죽음과 직결된 병환은 가족 모두를 특히나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들었어요. 단순한 일상일 뿐인데, 누군가에게는 경험하고 싶어도 다시는 겪어볼 수 없는 일이기에 항상 조심해야 하고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어요. 그들에겐 긴장과 예민함이 디폴트 값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특목고를 지원해보지 않겠냐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내심 기뻤던 금주는 처음으로 동생에게 학교 이야기를 건넸고, 도환은 그런 금주에게 당장 내일 학교에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동생 앞에서 할 소리냐고 매몰차게 대합니다. 아픈 동생 때문에 몇 년 동안이나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 하고, 항상 동생에게 우선순위를 빼앗기고, 몸과 마음이 편해야 할 집 안에서 눈치만 보고 살기 바빴던 금주는 쌓인 스트레스가 폭발, 결국 누나와 동생은 서로에게 씻기 어려운 상처만 입히고 대화는 끝이 납니다. 이후에 갑자기 병세가 심해져 병원에 입원한 도환이는 결국 그렇게 하늘나라로 가게 돼요. 그 일이 있던 이후 도환을 마주할 자신이 없던 금주는 결국 동생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고요.
금주는 사실 동생이 그렇게까지 밉지 않았어요. 아프기 전까지만 해도 둘의 사이는 원만했으니까요. 아프게 된 이후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동생이 살짝 밉긴 했어도, 빨리 낫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결국 떠나버린 동생으로 인해 금주의 엄마는 앓아누웠고, 금주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남기고 말아요.
금주가 나를 너무 닮았어... 나처럼 눈치 많이 보고... 항상 불안해하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지 않았는데 남은 자식 하나 볼 때마다 내가 실패한 엄마라는 게 너무 잘 느껴져서... 나 진짜 죽고 싶어, 엄마...
가족의 평화를 위해 목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살았던 자신의 모습이, 사실은 엄마를 죽고 싶게 만들었다는 걸 알게 돼버린 금주는 그 길로 마음의 문을 닫았어요. 누군가에게 애정을 품을수록 상대를 너무 의식하여 잘 해내보고자 했던 말과 행동들이 또다시 비슷한 결과를 초래할까 봐 애당초 그런 마음 자체를 가지지 않도록 말예요. 하지만 실상은, 그런 엄마를 평생 미워할 자신이 없어 엄마가 그런 마음이 들지 않도록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으며 살아가려 하고 있지만요. 정확히 1:1의 비율로 기브 앤 테이크가 불가능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왜 서로 나누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실은 사랑받기가 무서우면서 누구보다도 넘치는 사랑을 받고 싶은 사람이 금주였습니다.
참 모순적인 사고방식이죠? 그치만 우리 모두 다 그런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지 않을까요? 사람이라는 생명은 참으로 이상하게도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지만 왠지 궁금해서 보고 싶고, 미우면서도 좋기도 하는, ‘애’와 ‘증’을 같이 붙여 쓰는 태초부터 참으로 모순적인 생각을 하는 존재니까요. 그리고 작가님은 그래도 괜찮다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사람 사는 게 다 이런 거 아닐까? 모순적이고, 복잡하고 잘하려고 할수록 이상하게 꼬여가는 거. 그냥 거스를 수 없는 세상의 흐름에 내 몸을 맡겨보자.
그리고 저는 극 중 '이원아'라는 캐릭터에 가장 많은 이입이 되었어요. 외모도 예쁘고 집도 어느 정도 잘 사는 원아는 착한 캐릭터는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을 돋보이게 만드는 사람이거든요. 그런 가치관을 가진 원아는 자신과 같이 다니기 적당한 사람으로 금주를 골랐지만, 금주는 원아에게 관심이 단 1도 없습니다. 그런 금주가 왠지 얄미웠던 원아는, 독보적인 캐릭터로 언제나 가십의 중심에 있는 금주 뒤에서 조용히 담화의 물꼬를 틀어주는 역할을 자처했어요. 일부러 금주에게 다가가, 금주가 (받아들여도 나쁘지 않을) 자신의 호의를 거절하면 옆에 있던 친구들이 알아서 원아를 다독이고 금주를 대신 욕해주었으니까요. 원아는 그렇게 자신의 자존감을 채워갔습니다.
너희는 계속 내 편을 들어줘. 나한테 배금주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끊임없이 말해줘. 그것이 나의 쓰레기 같은 한 줌 자존감이 될 수 있도록.
하지만 못된 행동을 하면 벌을 받겠죠. 동생 기일이 다가오면서 심리적으로 몰려있던 금주한테서 친구들과 뒷담화하는 장면을 정면으로 들키게 되고, 강의실 안에서 원아는 금주로부터 모멸감과 수치심을 받습니다. "맞아, 금주 좀 이상하지"라고 동조하던 주변인들이 모두 하나같이 "그런데 뒷담화는 좀 아니지 않아?"라고 우디르급 태세변화가 일어나요. 그날 저녁 원아는 계속해서 억누르고 모른 체 해왔던 자신의 실체를 마주하고 절망해요.
두 번 다시 입지 않을 옷. 먹다 남긴 배달음식, 유통기한 지난 화장품. 그 모든 것들을 한데 모아 청소를 시작했다. 빈 상자 안에 작은 쓰레기들을 꽉꽉 눌러 담았고 빨아야 할 옷과 괜찮은 옷을 분리한 뒤 뭉친 머리카락과 각종 영수증, 폐지는 미련 없이 버렸다. 이 너저분하고 냄새나는 방이 쪽팔려서 죽으려는 내 발을 붙잡았다는 게 너무 웃겨서
그래도 다행히 원아는 자신이 잘못되었음을 인지하고, 금주에게 사과합니다. 사과를 하고 싶지만 사과를 명목으로 금주에게 말을 걸어도 되는지 모르겠던 원아에게 금주가 직접적으로 사과하라고 하거든요. 원아는 사실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살아가는 금주가 부러웠고, 금주는 자신이 엉망으로 살아가는 줄로만 알았는데 멋있었다는 원아의 말에 위로를 받습니다. 드디어 둘은 동등한 과동기 관계가 되었고요. 비록 둘이 같이 뷔페는 가지 못 했지만, 원아가 앞으론 그런 식으로 자존감을 채우지 않고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원아처럼 나아갔으면 싶고요.
금주와 한울이만큼의 아픔은 아니지만, 저 역시 가정에서 무조건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더라고요. 아직도 기억나는 몇 가지 일들이 있네요. 열심히 공부해서 과학 시험 100점을 받았지만 잘했다는 칭찬은 못 들어봤고, 너무 어렵고 힘들었던 한자 점수 50점에는 크게 혼났었습니다. 학창 시절 왕따를 겪었던 일을 대학생이 되어 엄마에게 허심탄회 이야기 할 때는, "너가 잘못해서 그런 거겠지"라는 말을 듣고 하루 종일 울었던 기억도 나네요.
그럼에도 경제적으로 부족한 것 없이 잘 산거 아니냐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아픔도 상대적인 것이고 과거에 받았던 스크래치는 없어지지 않고 옅은 흉터로 남아있습니다. 여러 일들이 있었고, 저는 집 안에서 제 이야기를 잘 안 하게 되었어요. 물어보시면 대답은 하지만요.
친구가 한 명도 없어 보일 것 같은 금주에게 사실 절친한 친구 한 명이 있습니다. 이름은 바로 차나리. 나리 역시 우울증에 시달리는 엄마와 소꿉친구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아니었던 사람으로 인해 적막한 삶을 보내고 있었어요.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시간이 많이 흐른 후 대학생이 된 후였지만, 어렴풋이 서로의 사정을 느끼고 있던 둘은 그렇게 서로 의지하고 베스트 프렌드가 되었어요. 서로의 거리가 두 시간이 걸리는데도 누군가 서글피 울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달려와주는 사이가 너무 부럽더라고요. 그리고 이런 나의 아픔을 알아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게 내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겠거니 싶어요.
그리고 왜 제목이 <썩은 핑크의 법칙>일까 많은 생각을 해보았는데요, 1월 17일 자에 오픈되는 41화 (본 편 마지막 화)에서 그 답이 나오더라고요. 이 글을 적는 시점에서는 아직 무료로 공개되지 않은 유료회차이기에 그 대사를 직접 적을 수는 없지만, 마지막화에 금주가 어떤 마음을 갖게 되는지 꼭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그 외에도 한울이에 대한 이야기, 같은 동아리 멤버인 지유 선배와 걸산이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만 작품의 재미를 위해 여기까지만 쓰려고 해요. 제가 쓴 글보다는 직접 웹툰을 보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고 유용한 시간이 되실 것 같습니다. 다들 <썩은 핑크의 법칙> 봐주세요,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