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 35분!
집안 공기가 싸늘하다.
이 이른 시간에 둘째 녀석 방문이 활짝 열려있고, 그 밝은 불빛으로 복도 끝이 환하다.
여간해서 자기 방 방문을 열어놓는 법이 없는 녀석인데, 웬일인가 싶어 다가 갔다.
교복을 단정히 입고, 책가방에 생수 한 병을 챙겨 넣고 있었다.
"뭐 해?"
"학교갈라고요."
"아침밥도 안 먹고? 이 시간에? 너무 빨리 가는 거 아냐? 과일이라도 줄까?"
"됐어요!"
"요플레라도 하나 넣어갈래? 가지고 가서 학교에서 먹던가?"
"됐어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하더니, 가방을 메고 쌩하니, 찬바람 돌게 집밖으로 나선다.
말투부터, 행동 하나하나에 찬 바람, 그 냉기가 그득하다.
그 뒷모습을 보고 돌아서니, 갑자기 후회가 인다.
'말 좀 조심해서 할걸!'
간밤에 있었던 일이다.
10시 반이 다 돼서 하교한 아들이 출출하다길래 미역국 한 그릇, 고기까지 듬뿍 올려 대령했다.
"엄마가 한우 양지 한 시간 넘게 푹 고아서 끓인 미역국이야. 고기가 진짜 맛있어. 많이 먹어"
"엄마! 고기가 진짜 맛있네요." 이때까진 분위기가 참 좋았다.
후루룩후루룩 밥 한 공기를 다 비우고 나서는 이제 22일밖에 안 남았다고 한마디를 했다.
하루하루 보내는 게 상당히 부담스러운지.....
지금은 아무 생각도 안 들고, 공부해도 집중도 안되고 그냥 시험이나 빨리 봤으면 좋겠다고 제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고3! 올해 수능일은 11월 14일이니, 이제 눈 깜짝할새 코앞으로 다가올 것이다.
식탁을 치우는 사이, 식탁 위 노트북을 켜서 보던 아들이 뜬금없이
"엄마! 저 대성 19 패스 지금 결재해도 돼요?"
"그걸 왜? 시험도 안 봤는데, 굳이 지금 왜?"
"10월 모의고사 결과도 그렇고, 지금 이 상태로는........ "
그 뒷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짜증과 화가 후욱하고 올라왔다. 시험도 보기 전에 재수, 반수 어쩌고 저쩌고 하는 아들의 태도가 어이가 없었다.
"야! 재수 아무나 하냐? 재수해서 점수 올리기가 쉬운 줄 알아? 대부분 현역 때보다 점수가 더 안 나오는 경우가 허다해. 학교에 있을 때, 학생일 때 집중해서 할 생각을 했어야지. 시험도 보기 전에 재수용 인강패스부터 살 생각이나 하고...... 엄마가 할 말이 없다. 할 말이 없어!" 하고 쏘아붙였다.
얼굴색이 싸악 변한 아들은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순간 아차 싶었다.
나도 불편한 맘에, 하릴없이 아들이 말한 대성 마이맥 19 패스를 검색해서 들여다봤다.
예비 고3을 대상으로 2026년 19 PASS를 사전 판매하고 있었다.
조건이 매력적이었다.
10월 28일 마감!
19만원에 전강좌 무료! 주요 대학 합격 시 강의료 환급! 1년간 무제한 배송비 무료!
*사전혜택은 사전판매 종료 후 다시 제공되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쉴 틈 없이 반짝반짝거리고 있었다.
우리 아들도 이 조건에 현혹 되었었나?
이번 시험에 그렇게도 자신이 없나?
아무튼 간밤에 그렇게 자기 방으로 소리 없이 들어간 아들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밥도 안 먹고, 너무 이른 시간에 쌩하니 집 밖을 나서니, 어제 엄마가 한 말이 엄청 서운했나 보다고 짐작만 할 뿐이다. 서운하다 못해 화가 나기도 했을 것 같다. 엄마가 공부 못한다고 나를 무시하는 거라고 오해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엄마가 한 말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쏘아붙인 말투와 태도가 더욱 우리 아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 것이다.
아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홧김에 짜증까지 섞어 팍 쏘아붙이듯 말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스러웠다.
시간 여유 있으니까 엄마도 알아볼게, 19 패스야 급할 것 없잖아.
아직 시험도 안 봤는데 네 마음이 많이 불안한가 보구나.
생각만큼 재수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야.
20여 일 남았으니까 일단 집중해서 마무리 잘해봐.
열심히 하는대도 성적이 맘같이 오르지 않아 네가 많이 힘들구나.
10월 모의고사가 좀 어려웠나 보네.
엄마가 도움이 못돼서 미안하다고 찬찬히 조용하게 말할걸.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받는 아들이라 평소에도 말 한마디 내 감정대로 내뱉기가 주저스러웠는데....
지금까지 할 말을 아끼며 잘 왔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종종 공부를 못해서 죄송하다고 말하는 아들,
그 말에 엄마가 더 미안해지는 아들이다.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내고, 철들어 맘 잡은 아들이 생활 속에서 보여주는 모습을 보며,
잘 지도하고 이끌어주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자신감 넘치는 아이로 자랐을 텐데 싶어 미안함만 더 앞선다.
반세기를 살고도 엄마 노릇하기가 쉽지 않다.
반세기를 살고도 말 한마디 정갈하게 정제해서 뱉어내기가 쉽지않다.
습관처럼 내 안에서 정제할 시간도 없이 툭 뱉어내고서 후회한다. 그래서 습관이 무섭다.
어른다운 엄마, 엄마다운 엄마가 되는 것은 더욱 힘들다.
나이만 많이 먹은 철부지같다.
철 좀 들자고 내가 나에게 되뇐다.
아직도 철없이, 생각나는대로, 느끼는 대로, 듣는 사람 배려하지 않고, 툭툭 내뱉고, 주절주절 말만 많은 나에게, 침묵 속에 자기 생각을 잘 정리하는 시간을 좀 가져보자고....다짐을 해본다.
쓸데없는 말은 줄이고,
정제된 말속에 진심을 담아,
타인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말 한마디에 말투에 그리고 말소리 톤까지 조심스럽게 신경써보자.
사려깊은 언어생활, 부드러운 언어생활을 위해 노력해보자.
2024년 10월 23일 수요일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이제 좀 신중해 보자고! 내가 나에게 주문을 건다.
"易地思之, 三思一言"
우리 아들! 오늘 밤 어떤 모습으로 귀가할지....내심 기다려진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