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수자라는 말이 스스로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여느 퀴어 청소년들에 비해 꽤나 평화로운 10대를 지나쳐왔다. 딸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엄마와의 거센 갈등, 정체성에 부담을 느껴 멀어진 친구들, 스스로에 대한 혼란 같은 것들은 나의 학창 시절에 없었다.
내가 중학생이던 시기에는 많은 방송사가 성소수자와 그 가족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보통은 자녀의 커밍아웃에 기함한 부모가 자식을 내친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방송을 통해 다시 그들을 만난 부모들은 대체로 이제는 자녀를 이해할 수 있겠다며 눈물로 화해를 청했지만, 기도하러 가자며 끝끝내 자녀의 진짜 모습을 외면하는 부모들도 있었다.
어느 날 나는 함께 텔레비전을 보던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아들이 게이라고 하면 어떨 거 같아?”
엄마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색해질 것 같아."
엄마의 반응을 상상하며 골라내었던 예상 답안 중 최악의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속에 조용히 이는 애석함을 지우기는 힘들었다.
당시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한 반에 여학생 15명, 남학생 25명 정도로 구성돼 있었다. 여학생, 남학생 간의 가시적인 대립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반장은 항상 남학생이 되었다. 반에 있는 모두가 자신과 같은 성별의 후보에게 투표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교실의 주도권이 묘하게 남학생들에게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여학생들의 외모 순위를 매기는 것은 남학생들의 오락거리 중 하나였다. 어떤 여학생들은 자신을 1위로 매긴 남학생과 연애하고 싶어 했다. 세미는 자신을 ‘얼굴 95점/몸매 90점/성격 90점=총 275점(1위)’으로 평가한 남자애와 연애를 했다. 첫 연애를 시작한 세미는 점심시간에 밥도 남자 친구랑 먹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미트볼 반찬도 남자 친구에게 양보하는 세미를 보며, 자신의 몸매가 100점이 아닌 90점으로 매겨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친구들은 그런 세미를 보며 ‘부럽다’ ‘좋을 때다’와 같은 말을 던졌지만 나는 세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뿐이었다.
고등학교는 여자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중학교 생활이 권태롭던 나는 아드레날린이 폭주하는 상태로 입학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미성년자도 가입할 수 있던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여자 고등학교와 관련된 온갖 게시물을 읽었다. ‘동아리 선배에게 고백한 후기’, ‘짝꿍과의 비밀 연애’, ‘신입생과 사귀는 이야기’ 등의 소설 같은 실화들을 양분 삼아 여고에 대한 로망은 무럭무럭 자랐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어쩌다 보니 지역에서 인지도가 높은 명문사학에 입학하게 됐는데, 그곳에는 딴 짓거리에 관심 있어 보이는 애들이 잘 없었다. 하루는 한 친구가 “연애는 술‧담배만큼이나 해로우니 스무 살이 되면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나는 친구들에게 스무 살이 되면 어떤 연애를 할 것이냐 물었다. 친구들은 저마다의 드림 보이를 그리며 각자 꿈꾸는 연애를 말했다. 남자 친구의 군대를 기다려보고 싶다는 로망이 있는 지현이는 고무신의 장점이 무엇인지 열변을 토했고 친구들은 깔깔 웃었다. 나는 친구들이 '네가 하고 싶은 연애는 뭐야?'라고 되묻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감흥 없이 학교에 다니다 보니 빠르게 3년이 흘렀다. 정신 차려보니 졸업식 날이었다. 그날은 유독 피곤했고 늦잠이 자고 싶었다. 알람을 끄고 담임선생님께 졸업식은 가지 못할 것 같다고 문자를 했다. 나는 다시 얕은 잠에 들었고,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꿈을 꿨다. 잠시 후 눈을 떴을 때는 집 안으로 드는 비스듬한 볕이 오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켠 휴대폰에는 온갖 알림이 쌓여 있었다. 페이스북은 친구들이 저마다 게시한 졸업식 사진으로 가득했다. 왜 졸업식에 오지 않았냐는 친구들의 문자에는 고민 끝에 답장을 미뤘다.
방 안이 적막했다. 연극의 1막이 끝난 느낌이었다. 관중이 없었는지, 관중들이 박수쳐주지 않았던 건지. 조용한 마무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