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말했다

(1) 왔나? 배고프제?

by malgeul


명절 연휴, 시골 할머니댁으로 향하는 길엔 언제나 하나의 풍경이 우리를 맞이했다.

마을 어귀에 접어들자마자 보이는 시뻘건 개울물.

쩌렁쩌렁 메아리치며 들리는 새된 비명.

그리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어느 집의 소, 혹은 돼지 한 마리가

멱이 따인 채 개울 바닥에 사지를 뻗고 드러누워 있었다.

명절이면 으레 온 가족이 고향으로 모이고,
‘마을 잔치’라는 것이 아직 남아 있던 그 시절이었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소나 돼지를 잡아 이웃들과 나눴다.


가축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분리하고, 숭덩숭덩 부위마다 살을 썰어내고

그럴수록 개울물은 점점 더 붉게 변하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댁으로 가려면 차에서 내려 개울 위 작은 다리를 걸어서 건너야 했는데

나와 사촌들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 해체쇼를 한참 동안 구경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유독 겁도 많고 비위도 약하던 내가

어떻게 그 풍경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봤던 걸까, 의아하기만 하다.

아주 어릴 적부터 보아온 일이라 아마 너무 당연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 시절 내가 멋모르고 스친 풍경은 그게 다가 아니었을 것이다.


마을에 가축의 시끄러운 비명과 발버둥이 잦아들 때면

집안의 여자들은 조용히 한숨을 쉬며 더 바삐 종종걸음을 놓았다.

그중에서도 바닥에 엉덩이 붙일 새 없이 바쁜 주인공은

바로 나의, 꼬부랑 할머니였다.


갓 잡은 소의 생간에 소주를 즐겨 먹던 할아버지.

방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고 당당히 방문만 열어젖힌 뒤

문밖으로 고갯짓 한 번, 헛기침 한 번이면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구는 남편.

암만 새천년이 왔다 해도 낡고 긴 곰방대를 뻐끔뻐끔 입에 물고

간암으로 눈을 감을 때까지 손에서 소주병을 놓지 않던 사내.

그 인생이 기고만장할 수 있었던 건 할머니의 덕이었다.


아들 둘에 딸 다섯, 그 손주들이 열다섯.

돼지를 잡은 날엔 할머니의 손이 더 바삐 움직였다.

뭉텅이로 받아온 고기를 한 번 더 얇게 썰어서

고추장, 간장, 마늘 같이 별 볼 일 없는 양념들을 넣고 버무린 다음

석쇠에 올려 연탄과 지푸라기로 지핀 불 위에 잘 구워 내면

뭐라 불러야 할까.

그리운 할머니표 특제 고추장 연탄 불고기가 완성된다.

어떤 갖은 양념을 넣어도 따라오지 못할 맛.

레시피를 안다고 해도 다신 찾지 못할 손맛.

궁금한 마음에 곰곰이 어릴 적 그때를 떠올려 봤지만...


근데 왜 한번도 할머니가 드시는 걸 본 기억이 없지?


어릴 적 나의 계절은 항상 할머니와 함께 찾아왔다.

봄의 시작을 알려주던 푸릇푸릇한 쑥, 냉이, 두릅

입안을 노랗게 물들이던 감자, 옥수수, 늙은호박

겨울 환상의 짝꿍, 갓 구운 고구마와 살얼음 낀 석박지

소주병에 꾹꾹 눌러담은 들기름과 참기름

알알이 실하게 익어가던 햅쌀, 대추, 땅콩, 단감...


그리고 철마다, 할머니의 꼬부랑 굽은 허리도

조용히, 익어만 갔다.


* * * * *

2부로 이어집니다.

할머니가 말했다 (2) 잘 가소, 잘 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