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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Sep 05. 2024

직장은 하나의 작은 메타버스다

열심히 일하되 과몰입하진 말자고요

세 번째 회사 생활,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다. 이젠 가정이 있기에 이전처럼 생(?) 퇴사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인데도.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다른 하나는 아주 간단하지만 큰 발상의 전환에서 기인한다. 그래, 직장은 메타버스였어.


직장생활을 한지 얼마 안 되었다면, 아니 실은 오래 했다고 해도 깨닫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한번 눈을 돌리고 나면 이렇게나 자명한 사실이 있나 싶다. 메타버스란 쉽게 말하면 가상에 구현한 현실의 세계다. 현실에 있는 이런저런 요소를 가상에 덧씌운 형태라는 뜻이다. 메타버스는 현실과 같으되 현실은 아니다. 마치 꿈과 같다. 잠에서 깨면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는 것도.


직장은 실존하는가? 이는 데카르트보다는 하라리적인 질문이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세운 모든 체계를 '상상의 산물'이라고 했다. 인류는 그 거대한 거짓말의 도움을 받아 협력체제를 만들었고, 문명을 건설했다. 그가 책 『사피엔스』에서 예로 든 건 프랑스의 자동차 회사 푸조였다.


푸조는 실존하는가? 푸조의 회사 건물, 푸조가 생산한 자동차, 직원 개개인은 실존한다. 하지만 푸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믿을 뿐이고, 그렇게 합의했을 뿐이다. 푸조는 서류 속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개념이다. 파산 서류에 적힌 사인 한 번으로 얼마든 사라질 수 있다. 삼성이든 애플이든 어디든 마찬가지다.




직장에서의 삶은 일종의 연극이다. 누군가는 사원이라는 역할을, 누군가는 대표라는 역할을 수행한다. 여기에 직무, 팀, 직급, 소속 등의 여러 가지 설정이 붙는다. 하지만 그 무엇도 그 사람 자신을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난 마케터로 일하고 있지만 나 자신이 마케터 자체는 아니다. 누군가의 고향이 부산일 수는 있지만 그 사람 자체가 '부산 사람'은 아니듯이. 그건 그저 누군가에게 덧씌워진 역할이고, 역할은 쉬이 변한다.


난 유통회사의 바이어였고, 출판사의 에디터였고, 지금은 모 회사의 마케터다. 그럼 난 바이어인가, 에디터인가, 아니면 마케터인가? 무엇을 고르든 그 역할은 퇴사나 이직, 혹은 해고 한 번으로 사라질 수 있다. 사인 하나가 푸조를 없앤 것처럼.


이는 직장이 내 삶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건 상관없이 적용되는 사실이다. 직장은 가상의 개념이니까. 하나의 메타버스니까. 메타버스 바깥에도 세계는 존재한다. 생각보다 훨씬 거대하게. 이를 깨닫기 위해 모두가 퇴사를 할 필요는 없다. 당장 퇴근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회사 정문을 나서는 순간 나는 누구인가? 여러 가지 대답이 있겠지만 직장인은 아니다. 그건 마치 꿈에서 깨었는데도 "난 하늘을 나는 새다!"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물론 내가 직장인이었다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다. 다만 직장인으로서의 내 '역할'이 다른 무언가로 변했을 뿐이다. 댄스 동호회 회원이든, 집순이든, 맥주집을 찾은 손님이든 뭐든 간에. 다음날 아침이 되면 똑같은 지하철을 타고 직장인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내 삶 전체를 회사에 의탁하는 이는 많지 않다. 회사에 충성을 다하는 열혈 회사원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걸 알고 나면 그래서 어디다 써먹을 수 있는가?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우선 직장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된다. 회사를 하찮게 여기라거나, 일을 대충 하라거나, 남들 무시하면서 살라는 말이 아니다. 일은 당연히 성실히 해야 하고, 못 하겠다면 다른 곳으로 가는 게 맞다. 다만 과몰입을 하지 않을 수는 있다. 가끔 회사가 곧 나고, 내가 곧 회사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는데 이는 대표나 오너에게조차 그리 좋은 태도는 아니다.


일을 성실히, 잘하는 것과 과몰입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축구경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건 멋진 모습이지만, 졌다고 해서 상대편 골키퍼에게 펀치를 날린다면 그건 선을 넘는 행위다. 직장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벗어나기도 쉽다) 나의 명함을 알아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몇몇 고위직을 제외한다면. 사실 그들조차 퇴직을 하고 이빨이 빠지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4 스타도 제대하면 아저씨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과몰입을 하지 않으면 반대로 자신을 낮추는 태도도 다시 생각할 수 있다. 실수를 하고, 일을 그르칠 수는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 직장 안에서의 일이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누군가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친 것이 아니라면 너무 스트레스를 받거나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메타버스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갑자기 직장생활이 엄청나게 행복해진다든지, 혹은 강철 멘탈이 되지는 않는다. 상사의 잔소리는 여전히 심장을 공격하고, 생활인으로 살려면 직장에 다녀야 하고, 거래처는 갑을 관계에 따라 날 다르게 대할 것이다.


다만 회사 바깥에도 당연히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 그 세계는 (<미생>에서 말하는 것처럼) 지옥이 아니라 그저 현실이라는 것, 이 모든 건 언젠가 끝난다는 것, 직장에서 우린 모두 저마다의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라는 것, 직장에서의 나도 나고 직장 외에서의 나도 나라는 것, 특히 직장을 뗀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 그것만이 바뀔 뿐이다.


이건 어쩌면 직장에 관해 알아야 할 전부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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