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비밀금고

by 행동하는독서


"아빠 우리 돈 지금 어디 있어요?"

아이들이 세뱃돈으로 주머니가 두둑해지자 작년 세뱃돈을 찾았다. 작년에 주식에 넣겠다고 내가 모두 거두었던 것이 궁금해진 모양이다. 아이들은 당연히 주식 계좌에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 돈을 쓴 건 절대 아니다. 펀드 계좌를 만들긴 했는데 주식이 곤두박질치면서 본의 아니게 내가 가지고 있다. 주식 시장이 좋아지면 편드에 넣어두려고 기다리는 중이다.


초등생 두 아이를 앉혀놓고 지금 주식이 엄청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너희가 넣은 돈이 정확하게 반 토막이 났으니 더 이상 찾지 말라고 했다. 두 아이는 당장 머리에 띠를 두르고 시위라도 할 기세였다. 작년 이맘때 왜 주식에 넣어야 하는지 화이트보드까지 세워놓고 장황한 설명을 했던 것은 바로 나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반이 없었다는 말을 들었으니 입장을 바꿔봐도 화 날만 하다. 일단, 너희가 아빠 나이 되면 아마도 고맙게 생각할 거니까, 조용히 기다리라 했다. 졸지에 거짓말쟁이 아빠가 되고 말았으니 참담하기만 하다.


올해는 둘째가 작년에 비해 3배나 되는 돈이 들어왔으니 어디든 넣어두어야 했다. 주식에 넣자고 했더니 펄쩍 뛰며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또 반 토막 나면 어떡하냐고 절대 거절을 행사했다. 절대 아빠 말대로 안 하겠다며 이제는 통장에 넣어둘 거란다. 둘째와 막내는 매일 싸우지만 이럴 때는 의기투합하는 게 찰떡이다.


좋아! 그럼 은행 가자! 통장을 다시 만들자! 내가 앞서서 둘을 데리고 은행으로 갔다. 아이들 돈을 가지고 함께 은행에 온건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대기하는 내내 돈을 어떻게 모을 건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도 용돈을 아껴서 아빠, 엄마 선물을 사는 것을 보니 다 큰 모양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아버지 손을 잡고 새마을 금고에 가서 통장을 만들었다. 비밀번호 246, 세 자리 비밀번호를 기억하라며 병풍 접기 한 초록색 벽돌무늬 통장을 건네주셨다. 지금처럼 전산으로 기록되는 시절도 아니다. 여직원이 볼펜으로 얼마를 넣었는지 적었고, 확인을 위해 금액에 작은 도장을 찍어주던 통장이었다. 참 오래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나만의 통장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왠지 뿌듯했는데, 지금도 그 통장이 있을 리는 만무하다. 통장 만들기 위해 아버지는 내 이름을 새긴 목도장을 하나 만들어주셨다. 둥근 타원형안에 내 이름이 새겨진 도장이 대단한 물건처럼 느껴졌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갑자기 새마을 금고 통장을 만든 이유가 있었다. 비가 몹시도 쏟아지는 날 나는 무척이나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내게 생긴 동전 한주먹을 숨길 때가 없어 집 뒷담 밑에 묻어둔 적이 있었다. 갑자기 내리는 폭풍우에 떠내려갈까 봐 걱정되었는데 말도 못 하고 끙끙대고 있었다. 산 밑에 있던 집이라 비가 많이 내리면 가끔 산의 흙이 담이랄 것도 없는 담을 넘어 뒷마당으로 쓸어 내려오곤 했다. 결국 울음을 터트렸고 아버지는 왜 그러는지 차근차근 물으셨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우산을 쓰고 돈을 파냈다. 흙을 씻어낸 동전을 세어 내 통장을 만들어주셨다. 돼지 저금통을 하나사주셨을 수도 있는데 내게 돈 모으는 법을 알려주시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이 사건을 잊을만하면 이야기하곤 하셨다.


아이들과 은행에 오고 보니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알듯하다. 학교도 가지 않은 막내가 돈을 모은 것이 기특하셨을 테다. 비록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지만, 자기가 모은 돈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려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맘이 아니겠는가? 아버지는 행동으로 돈에 대한 교육을 해주셨다. 사실 아버지는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셨지만, 제대로 금융교육을 보여주셨다. 돈이 없으셔도 동네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베풀고 다니셨으니 참 아이러니한 분이셨다.


아버지는 돈을 묻었다는 사실 하나로 내가 부자로 살 거라고 하셨다. 보통 아들이 아니라며 만나는 분들에게 에피소드를 전하셨다. 별거 아닌 통장 만들기 이야기지만 내가 믿고자 하면 내 믿음이 되고 만다. 아버지 말씀대로 언젠가는 부자로 살 거라 믿어진다. 그래도 아이들과 은행에 와 있으니 마치 부자가 된 듯하다. 마음이 무척이나 넉넉하다. 돈에 관한 아이들의 생각을 듣고 있으니 그때 아버지도 마음만은 부자로 사셨으리라 생각된다. 이제는 아이들이 권리 행사도 보장해야 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