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을 향한 한 소년의 구슬픈 동경
마음. 이보다 복잡하고 미묘한 단어가 또 있을까. 인간은 방대하고 깊은, 저마다의 각기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마음은 뒤섞여 있어 소유자조차 그 방향을 알지 못한다. 애절해하고 아파하는 것. 고뇌하고 힘겨워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감정뿐만 아니라 행동도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마음’ 하나와 평생을 함께해야 한다. 그러니 마음을 잘 조절하여 그 주인이 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숙명일지 모른다. 마음의 노예로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이 작품은 한 소년과 그 소년이 동경하는 선생님의 이야기이다. 선생님은 세상과 자신을 철저히 고립시킨 채 외로운 생활을 하는데, 그것은 남들에게는 절대 털어놓지 못하는 자신만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글을 읽는 동안 내용과 제목인 [마음]을 연결 지어보려고 했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마음이라는 단어가 가진 추상성 때문에 둘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는 것이 힘들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마음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러면 모든 책에 ‘마음’이라는 제목을 달아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이 책이 나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는 것은 분명했지만 제목에 대한 의문은 풀지 못 한 채 책을 덮었다.
제목과는 별개로, 이 책이 남긴 여운은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았다. 왜 선생님은 그런 선택을 해야 했을까. 그게 최선이었을까. 윤리적인 삶이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질까. 무엇이 그토록 선생님을 고독에 빠지게 만들었을까. 묵묵하고 빠르게 읽었던 책임에도 꽤 많은 질문을 남겼다. 그 질문을 곱씹으며 여러 생각에 빠졌는데, 답을 궁리하는 과정에서 소세키가 이 작품을 마음이라고 명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자연스레 깨닫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자는 어리석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였던 선생님과 K라는 친구. 둘은 그 누구보다 도덕과 윤리를 지향했다. 자신의 신념 아래 드높은 목표 하나만을 바라보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그 굳은 의지는 그들의 삶의 의지를 강하게 만든 한편, 그들도 모르는 사이 일종의 족쇄가 되어버렸다. 도덕적으로 살아야 해. 윤리적으로 살아야 해. 이 관념적인 문구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삶에 개입하며 그들을 옭아맸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현실 속을 살아가는 그들은 이상에 미치지 못 할 때마다 죄의식을 가지게 된다. 결국 그 괴리가 만들어내는 양심, 죄의식, 죄책감에 묶여 그들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누구보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싶지만 아이러니하게 과거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토록 처절한 사람의 내면을 표현하기에 ‘마음’보다 적절한 단어가 무엇이 있을까. 제목의 이면을 깨닫자 작가의 혜안에 감탄이 나왔다.
이상을 좇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이기에 자신이 위치한 곳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삶을 지탱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어 우리를 나아갈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그것이 강박이 된다면 우리는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없다. 솔직해지지 못하고 나 자신을 숨기게 된다. 나는 정의를 좇는 사람이니 절대 그럴 리 없다는 합리화와 함께 인지부조화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선생님과 K 모두 자신을 조금이라도 내려놓고 본인의 마음을 들여다봤으면 이 모든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말은 쉽다. 내가 주인공들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단정하는 것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두 주인공은 이상을 좇는 동안 그들의 마음은 저 끝이 보이지 않는 지하까지 추락했다는 것이다.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상에 상처를 새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를 헤쳐나가는 단서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소년의 선생님에 대한 동경은 단순한 존경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그것을 뛰어넘은 어떤 것이었다. 선생님이라면 온 몸을 바칠 만한 그런 마음. 분명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난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가는 거다. 그 위에 도덕이나 의무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을 놓치는 것이야말로 진정 미련한 짓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전통적으로 도리라고 여겨지는 것을 져버리고 자신을 믿은 주인공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런 어마무시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나보다는 훨씬 더 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리고 많은 장례를 치르면서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 가족을 잃은 사람 위에는 그 어떤 재단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 사람이 상을 치르는 동안 컴퓨터 게임을 하든, 치킨을 먹든, 혹은 그냥 누워 자든. 그 누구도 그를 손가락질 할 수 없다. 소년도 마찬가지이다. 그 결정의 무게를 소년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선택을 온전히 책임질 수만 있다면, 그 마음이 진심이라면 소년의 행동은 존중되어야 한다. 후회는 소년의 몫이지 우리의 몫이 아니니까. 이후의 소년의 이야기는 소설에서 볼 수 없지만 그가 선생님의 몫까지 열심히 삶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