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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광문 Jan 10. 2022

일상적 공간의 기억

옛날의 장소는 마술과 같은 공간

장소는 기억의 보고[報告]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고, 느낀 모든 것, 그 일상은 결국 우리의 인생이 된다.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지도록 틀고 또 틀기를 수 백 번 반복해서 들었던 옛날 음악을 다시 들을 때면 아련했던 추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처럼 추억의 장소와 그곳에서 경험했던 기억들은 다시 보는 마술과 같은 공간이 된다. 기억의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나 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처럼 슬픈 사연이 된다. 좋은 기억들은 아주 희미하게 재생되지만 나쁜 기억들은 또렷이 현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이 기억을 되찾기 위해 애쓰듯이 과거의 공간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끓임 없이 기록하고 사진을 찍어 놓는다.


왼쪽 1970년  / 오른쪽 2021년 같은장소,기억의 공간들


왼쪽 1970년  / 오른쪽 2021년 같은장소 종로 낙원상가


왼쪽 1970년 / 오른쪽 2021년 같은장소 종로 3가  [사진출처:사라진 것들의 이야기 채널]


나의 출생지 서울 성북구 단독주택 부락은 이미 사라지고 콘크리트 아파트로 채워져 있다. 이제 더 이상 나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은 없어졌다. 단지 개발과 발전의 역동성만 느낄 수 있을 뿐 사진 속 모습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최근 집값이 폭등하면서 앞 다투어 내어놓는 부동산 정책은 끊임없이 개발을 통한 주택공급을 하고 있다. 역사적 건물 보존에 욕심을 낸다면 차라리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 훨씬 수월해 보인다. 지금으로서는 도시의 풍경을 조화롭게 그려내지도 못한 채 사라지는 개발의 비극을 멈출 방법이 없어 보인다.


나에게 집이라 이름하는 아파트, 주택, 혹은 건축물들은 아직 장소성을 가지고 있는 공간적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이것은 장소가 아니라 물리적인 공간일 뿐, 일시적인 부동산, 들고 다닐 수 없는 재산에 불과하다. 과거의 공간이 아니라 언제든지 팔아넘길 수 있는 자산의 공간인 것이다. 여기에 나의 기억 속 역사와 사회적 정체성을 말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고 슬픈 이야기다.


나 역시 기억과 기억들 속 과거의 장소를 기웃거렸던 이유는 단지 추억에 젖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쩌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매력 없는 콘크리트 아파트에 더 이상 기대감이 없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저층으로 대지지분이 많으면 그나마 재건축, 리모델링으로 용적률을 키울 역량이 있다. 그러나 최근 건축물은 최고층을 지어내고 본다. 좁은 땅덩어리에 임계치까지 오른 건폐율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매끈하고 세련된, 그리고 우람하게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른 건축물은 도시가 계획한 그럴듯한 풍경이다. 그 풍경은 사람들을 도시에 끌어들이고 꿈꾸게 하며 동경하게 한다. 여백이 해체되면서 빈 공간이 아니라 풍요로움으로 가장된다. 여백은 없이 점점 좁아지거나 사라져 간다. 나는 진절머리 나는 현대화된 도시 변방으로 떠나 살고 싶다.


운정 더 힐스 분양광고 조감도



도시는 끊임없이 변하고, 덩치를 키운다. 변하지 않는 것은 도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현재와 미래만 존재하는 곳, 땅이 뒤집히고 새 건물이 들어설 때마다 우리의 풍경과 기억들은 송두리째 뭉텅이로 뜯겨 나간다.

도시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낙오와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문득 도시와 함께 사라진 나의 잃어버린 과거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최근으로 돌아가도 모든 기억을 낱낱이 기억해 낼 수는 없다. 기억력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매일 일기를 쓰고 기록도 해보지만 유감스럽게도 내 기억의 장소가 세밀하게 표현되지 않는 점은 너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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