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雜)에 대한 오해
번잡, 잡식, 잡담과 같이 '잡雜'이라는 단어는 뭔가 중요하지 않은 자질구레한 이미지를 풍긴다.
그러나 잡雜은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찰스 다윈은 이렇게 말했다.
가장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도 아닐뿐더러
가장 현명한 자가 오래 사는 것도 아니다.
변화하는 자만이 유일하게 살아남는다
우리는 슈퍼마켓에 가면 항상 동일한 품질의 쌀과 밀가루, 각종 채소를 얻을 수 있지만 자연에서 이는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니다.
인간이 기르는 식물은 인간이 준비된 환경에서 길러진다. 발아 시기와 성장 시기가 일정해야 하고, 먹었을 때 맛이 좋은 품종만이 선택되어 길러진다.
그러나 자연 속의 생명은 그런 식으로 생존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잡초에 속하는 토끼풀은 '청산'이라는 독성을 만들어내는 품종과 그렇지 않은 품종이 있다.
유럽 남쪽 지방에는 토끼풀을 먹어치우는 달팽이들이 있는데 이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독성 물질을 생산한다. 그러나 유럽 북쪽 지방에는 그러한 달팽이들이 서식하지 않아 독물질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잡초학 연구자들이 모인 미국 잡초학회에서는 잡초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인류의 활동과 행복과 번영을
거스르거나 방해하는 모든 식물
잡(雜)이라는 구분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러나 사실 분류와 정의 자체가 전적으로 인간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분류의 기준은 언제나 명확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연두벌레라는 미생물은 식물과 동물의 특징을 모두 지니고 있어 식물과 동물 양쪽으로 분류된다.
양파는 백합과로 분류하기도 하고 수선화과로 분류하기도 한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는 의미로서 'Black Swan(검은 백조)'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인간의 분류 때문에 태동한 의미이기도 하다.
백조(白鳥)는 말 그대로 흰 새였다. 처음 백조를 분류했던 사람들 주변에는 하얀 새밖에 없었다. 그 사실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너무나도 자명했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대항해시대로 세상 밖으로 나가던 17세기 무렵,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견된 단 한 마리의 검은 백조는 '백조'의 의미를 뒤집어 버렸다.
고래와 돌고래는 일반적으로 몸의 크기로 분류하는데 4~5M 미만이면 돌고래, 이상이면 고래인 셈이다. 만약 제주도 앞바다에 나타나는 돌고래 가족 중 하나가 4M가 넘는다면 그는 돌고래 가족과 같이 다니는 고래일까?
농업혁명으로 농사를 지으며 인류에게 필요한 풀과 그렇지 않은 풀이 구분되었다.
인간이 재배하는 식물은 '작물'이 되었고, 재배하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는 불필요한 식물들은 잡초로 구분되었다. 잡초라는 단어를 보면 단지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풀이 자라는데 훼방을 놓는 중요치 못한 풀로 여겨질 뿐이다.
우리가 잡초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도 지극히 인간적이다.
끈질기고 강한 것에 잡초 같다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사실 잡초는 연약한 존재이다.
식물들은 땅 위에 드려지는 햇빛과 공기, 땅 밑에 있는 물과 영양분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한다. 잡초는 다른 식물들과 이런 경쟁에서 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잡초는 되도록 다른 식물과 싸우지 않는 것을 기본 전략으로 삼는다.
길가나 논, 밭처럼 인간이 만들어낸 특수한 장소는 숲 속에서 강한 식물들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이다. 잡초는 이런 곳을 노려 자란다.
비포장도로 주변에서 자라나는 질경이의 학명에는 '플란타고'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 '발바닥으로 옮긴다'는 뜻의 라틴어 의미를 가진다. 한자 이름은 '차전초車前草'라고 불리는데 길을 따라 자라나기 때문에 이름 붙여졌다.
질경이의 씨앗은 물에 젖으면 끈끈해져 달라붙는 성질이 있다.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나 다른 동물, 심지어 차에 붙어 질경이의 씨앗을 옮긴다.
일본 골프장의 주요 잡초인 세포아 풀은 더욱 신기하다.
골프장에는 잔디 높이가 다른 구간이 존재하는데 러프, 페어웨이, 그린 등이 있다. 골프장에서는 이 구간을 관리하기 위해 잔디를 주기적으로 정해진 높이로 자르는데, 구간마다 세포아 풀이 이삭을 맺는 위치가 다르다고 한다. 잔디 높이가 가장 높은 러프와 가장 낮은 그린에서 세포아 풀은 잔디가 깎여지는 높이보다 조금 낮은 곳에서 이삭을 맺는다.
밟혀도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밟혀서 씨앗을 뿌리고, 애초에 밟히지 않기 위해 처음부터 납작 엎드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