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후반과 20세기 사이, 프랑스 인상파의 대표주자 클로드 모네가 그린 해돋이 그림에서는, 땅을 갓 벗어나는 감홍빛 해가 쏟아내는 빛때문에, 하늘과 땅과 물의 경계가 모호하고, 건물의 형체도 모호하다.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물결 위에 흩어진 해그림자와 흐릿한 보트 하나 둘, 그 위로 붉게 타오르는 새벽노을이 아름답다. 정확함이나 정교함이 없는 거친 붓터치만으로도, 해돋이는 짙은 인상을 남긴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인상주의 음악이 프랑스를 중심으로 등장했다. 인상주의 음악은 강렬한 감정이나 주제를 표현하는 기존 장르들과 달리, 물, 바람, 빛 등 자연의 순간적인 아름다움이나 분위기를 음악으로 표현했다. 인상주의 음악의 대표주자로 드뷔시와 라벨이 있는데, 둘은 같은 파리 음악원 선후배였다. 선배 드뷔시가 반항아처럼 듣보잡 화음을 만들어냈다면, 10 여년 후배인 라벨은 가브리엘 포레에게 음악을 배웠다. 우리에게는 발레음악 볼레로로 유명한 라벨은 고전적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의 곡들은 정교하다. 반면, 드뷔시는 형식보다 인상주의 색채에 더 집중해서인지, 지금은 인상주의 하면 사람들이 드뷔시를 먼저 떠올린다. 1889년 파리 세계박람회에서 들은 자바음악에서 영감을 얻은 드뷔시가 이듬해1890년에 '달빛'을 발표했는데, 요즘 이 곡은 인상주의라기보다는 후기낭만주의에 가까운 곡으로 평가받는다. 1901년에 라벨이 리스트의 에스테 정원의 분수에서 영감을 얻어서 작곡한 '물의 유희'를 발표했는데, 이곡은 전형적인 인상주의 곡으로 분류된다. 드뷔시 곡을 들으면 꼭 라벨 이야기가 나오고, 라벨 곡은 자주 드뷔시와 비교되면서, 둘의 열렬한 팬들은 드뷔시가 낫다 라벨이 낫다고 경쟁한다. 하지만 정작 이 위대한 두 작곡가들은 서로 비판하고 존경하고 옹호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다.
라벨을 잘 치는 아르헤리치(1941)는 아르헨티나 출신이며, 1965년에 쇼팽콩쿨에서 우승했다. 지금은 풀어헤쳐진 채 풀풀 날리는긴 백발이꽤 유명하다. 아르헤리치는 남자 피아니스트 못지않게 몸도 크고, 손도 두껍고 손가락도 튼튼해서, 그녀의 연주에서는 늘 힘이 넘치는데, 여자 피아니스트 특유의 유연하고 풍성한 감성도 잘 살아있다. 세 번 결혼했고, 두번째 남편이 유명한 로얄 필의 지휘자 샤를 뒤투아다. 무슨 곡인지 몰라도 한참 들으면, 그냥 흘러가는 물인가 싶다. 깊은 바닷속 같은 큰 물살도 느껴지고, 그 위로 일렁이는 파도와 이리저리 움직이는 작은 물결과 흩어지는 물방울을 느낄 수 있다. 눈을 감고 들으면 온몸이 물따라 일렁이는 듯 편안해지지만, 난이도가 매우 높은 곡이다.
반면, 드뷔시의 달빛은 악보 난이도가 다소 낮게 느껴지는지 어린 학생들이 많이 도전한다. 그런데, 현악기가 아닌 건반악기 피아노로 달빛을 부드럽고 은은하게 표현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조금만 서투르면 뚝뚝 끊기고 거칠게 느껴지기 십상이다. 2015년 쇼팽콩쿨에서 우승해서 모든 한국인들에게 큰 자랑이 된 조성진이 앙코르무대에서 이 달빛을 연주한 적이 있다고 한다. 마침 조성진이 천정이 높은 큰 방에서 혼자 연주한 달빛 영상이 유튜브에 있어서 같이 올린다. 밖이 깜깜했으면 더 좋을 뻔 했다. 어쨌든 조회수가 무려 천만에 가깝다. 참 부드럽다.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 물의 유희 (Jeux d'eau) 젊은 아르헤리치의 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