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세계적 스타로 떠오르던 바이올리니스트 이작 펄만이 공연 직전에 런던 심포니와의 협연을 취소했다. 런던 심포니는 부랴부랴 1967년 리벤트리트에서 우승한 정경화를 섭외했다. 리허설 무대에서 단원들은 정경화 몰래 원래 공연 프로그램이던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대신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다. 정경화는 당황했지만 반사적으로 오케스트라에 맞춰 연주했다. 그러자 장난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오히려 더 크게 놀라고 당황하며, 짓궂은 신고식이 끝났다. 1970년 5월 13일 정경화는 클래식계의 아이콘인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멋지게 협연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베토벤, 차이코프스키, 부르흐와 더불어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는 세계 4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불린다. 이 중에서 특이하게도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만 두 번째 소절부터 바로 솔로 바이올린이 화려하게 시작하고, 세 악장이 쉬지 않고 죽 이어진다. 특히 솔로 바이올린이 주 멜로디를 연주하며 전체 곡을 이끈다. 그러니 오케스트라가 먼저 시작하고 바이올린 솔로가 나중에 나오는 차이코스프키인 줄 알고 기다리다가 멘델스존으로 바뀌면, 솔로 바이올리니스트 입장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무방비 상태였던 정경화가 바로 멘델스존을 연주해냈다는 건 정경화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사건이다.
이듬해 1971년 BBC 스튜디오에서, 노란 드레스를 입은 정경화는 지금 보면 좀 생뚱맞은 동그란 포듐 위에 서서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다. 그리고 이 카리스마 넘치는 낭만적인 연주는 동양인 여자가 드물던 전 세계 클래식계에서 전설적인 연주가 되었다.
정경화를 스타덤에 올린, 이 최고의 바이올린 곡을 만든 멘델스존은 이름 그대로 '행운아(Felix)'였다. 많은 예술가들이 경제적으로 궁핍했거나, 집안의 반대로 힘들었거나, 살아생전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다면, 멘델스존의 집안은 부유하고 화목했다. 어머니가 아마추어 음악인이었고, 누나 파니도 13살 때 바흐 전주곡 24곡을 암기해서 연주했던 신동이었다. 세계적 안목을 갖춘 아버지는 인본주의와 정신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늘 배려하고 아낌없이 후원했다. 12살 멘델스존의 연주를 들은 노년의 괴테는 '멘델스존의 연주가 어른의 세련된 대화라면, 모짜르트는 어린애 재잘거림'이라고 했다. 16살에 이미 성숙한 안목을 가졌던 멘델스존은 '로시니는 허풍쟁이고, 리스트는 손가락만 많고 머리가 없다'고 평했다(ㅋ). 1827년 대학에 간 멘델스존은 수영도 잘하고, 말도 잘 타고, 춤도 잘 추고, 게다가 뛰어난 당구선수였다. 멘델스존은 멋쟁이 신사였고, 아름다운 아내와 결혼해서 예쁜 아이 다섯을 낳았고, 다 잘 자랐다. 1847년에 멘델스존은 슈만을 비롯한 음악가들과 유명인사들의 지지를 받으며 라이프치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 예술대학을 설립하고 교수가 되어 작곡을 가르쳤는데, 지금 이 학교가 독일에서 제일 오래된 음악학교다. 자식을 잘 키우고 가화만사성을 원한다면, 아들 멘델스존에게 행운을 선사한 아버지 멘델스존을 배우면 좋을 듯싶다.
멘델스존은 대중들에게 잊혀졌던 바흐를 부활시키고, 몇십 년 몇백 년 지난 남의 곡을 연주하는 연주회 전통을 만들었다. 그 시대에는 레코딩도 없었고 대부분 본인 곡만 스스로 몇 번 연주했기 때문에, 그 음악가가 죽으면 그 음악도 자연스레 잊혀졌다. 바흐도 하이든, 모짜르트, 베토벤 같은 음악가들 사이에서만 명맥이 이어지고, 대중들에게는 잊혀졌다. 그런데 14살 크리스마스 때 할머니에게 바흐의 마태수난곡 악보를 선물 받은 멘델스존은 바흐의 열렬한 팬이 됐다. 바흐가 죽은 지 80년 즈음 지난 1829년에, 20살 맨델스존이 이 곡을 편곡하고 지휘해서, 잊혀졌던 바흐가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바흐뿐만 아니라, 1833년 라인 음악축제에서 멘델스존은 헨델과 베토벤 교향곡을 지휘했다. 이렇게 작곡가와 지휘자와 연주자가 분리된 현대적인 연주회 형식이 정착된 덕분에, 이후 브람스, 바그너, 베를리오즈처럼 작곡만 하는 음악가들이 좀 더 수월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같이 협연했던 쇼팽과 '머리는 없고 손가락만 많다'고 비꼬았던 리스트, 베를리오즈와 '낭만파 형제'였던 멘델스존은 파리에서 머무를 때 그들의 형편을 잘 봤기 때문인지, 연주자들에게 비싼 연주비를 주려 애썼다. 20살 때부터 여러 차례 이어진 영국여행에서 영감을 받은 멘델스존은 음악적 삶(Musical Life)이 있는 지금과 같은 음악 생태계를 만들었다.
음악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깊이 교류하던 누나 파니가 죽자, 애통해하던 멘델스존은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반년 뒤 38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바이올린 협주곡은 멘델스존이 6년 동안 작곡해서 죽기 2년 전인 1844년에 완성했다. 이곡은 그의 유복했던 삶만큼 밝고 따뜻하고, 사랑과 열정이 넘치며 아름다워서, 낭만주의음악의 대표곡이 되었다.
다시 정경화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우리나라의 자랑인 정트리오 세 남매는 한예종 교수인 첼리스트 정명화, 1974년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러시아인과 공동 2위를 차지한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인 정명훈, 줄리어드 음대 교수인 정경화이다. 부모님이 식당을 운영하면서, 세 남매를 교육시킨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다. 지금은 셋 다 우리나라 음악계의 유명한 원로지만, 1970년대에 클래식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서 이 세 남매의 성공은 불가능을 극복한 기적의 시작이었다.
이들 음악 1세대들은 해외에서 배워온 내용을 온 힘을 다해 그다음 세대에게 전수했다. 1977년 금호재단이 설립되어서, 반백년 동안 1000명 이상의 음악영재를 발굴해고 공연기회를 줬다. 1980년, FM 93.1 KBS 클래식 채널이 개국했다. 자가용이 드물던 시절에는 외제 악기가 차 한 대 집 한 채 값보다 비쌌는데, 국산악기가 싸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에 영창피아노(1956)가 생산량 세계 1위를 달성했고, 삼익악기(1958)도 전성기를 누렸다. 심바이올린(1962)이나 효정바이올린(1986) 등 현악기를 만드는 회사들도 세를 확장했다. 학교에 피아노가 보급되었고, 동네 골목마다 피아노 학원이 생겼으며, 집집이 아이들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1991년에 대한민국 문화발전을 위한 국가전략에 따라서 대통령령으로 설립된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줄리어드음대를 모델로 삼고, 영재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수많은 클래식 영재들을 교육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한국 음악의 수수께끼(2012), K클래식 제너레리션(2020)'에서 티에리 로로 감독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공을 콕 짚어서 이야기한다. 2015-2022년 사이에만 전 세계 유수 15개 콩쿨에서 1위-3위가 20명 이상 쏟아져나왔다. 한예종 설립 30년 만에 절대적인 숫자만으로도 한국은 세계 1위를 달성했다.
조성진, 임윤찬의 기적이 맨 땅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다. 그 맨 앞에 정경화가 있었다.
멘델스존 (Jacob Ludwig Felix Mendels-sohn Bartholdy, 1809-1847) 독일 (함부르크 제국) 음악가
바흐 (1685-1750)
협주곡 (Concerto)은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 같은 독주 악기와 오케스트라로 구성된 3악장 형식의 곡이다.
티에리 로로, 다큐멘터리 영화 '한국 음악의 수수께끼 (Korean music mistery, 2012), K클래식 제너레리션 (K classic generation 2020)'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