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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월과 팔월 Apr 03. 2017

웰다잉(Well-Dying) 그리고 우리의 집

죽음(Dying)의 관점에서 바라본 우리의 집

2016년 1월 8일 일명 '웰다잉 법(Well-Dying Law)'으로 불리는 연명의료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법은 회생 가능성이 낮은 환자들로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 등 특수장비에 의존해 무의미한 연명을 치료를 받는 환자 혹은 사망이 임박한 환자에게 의미가 없는 단순 연명의료행위를 합법적으로 중단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다. 구체적으로는 임종기에 놓인 환자가 자신의 뜻을 담은 연명의료계획서 또는 사전의료의향서 같은 문서를 남기거나 가족 2명 이상이 평소 환자의 뜻이라고 진술하면 의사 2명의 확인을 거쳐 연명치료를 중단하도록 하는 법이다.


이제 우리는 바야흐로 죽음의 공간으로서 우리의 집에 관하여 생각해볼 시기를 맞이했다. 통계청과 국립암센터에 의해 조사된 바에 따르면 대략 10년쯤 전엔 지난 2006년 가정에서 사망한 사람의 비율이 30%, 의료기관이 55%, 병원 이송 중 사망 등이 15%로 확인되며, 2016년 조사에 따르면 병원에서 사망한 비율이 약 88% 가정에서 사망한 비율이 9%를 기록했다. 물론 이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임종 전 마지막 순간까지 병원의 치료를 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 말 그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의료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시대에 가까워졌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이제 우리는 집에서 죽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마지막 눈을 감는 그 순간 만일 내가 생전 한 번도 생각지 못한 어느 병실의 침상이라면 어떤 생각이 들까?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떠올리며 '나만의 집'을 떠올리지만 꽤나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 순간으로서 '우리의 집'에 관하여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작년 통계를 적용시켜서 이야기하면 만일 이 글을 10명의 사람이 읽었다면 그중 9명은 차가운 병상위에서 마지막 임종의 순간을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 고작 단 1명 정도의 사람만이 자신이 그래도 자신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공간에서 생에 마지막 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여태 생각한 것보다(아니 생각하지 못한 것만큼이나)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보낸 지난 수십 년 간의 추억이 담긴 공간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것은 힘들다.


자극적으로 들리겠지만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임종에 가까워질수록 의료비가 전체 소비 중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올라간다. 특히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기 위해 마지막 몇 달 아니 마지막 몇 해 사용하는 의료비는 사실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내가 정말 좋은 보험을 잘 들어놓았고, 그리고 저축을 넉넉하게 잘 했다면 최소한 의료비 걱정은 안 해도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이에 더해 사실 어느 정도가 어느 정도가 넉넉한 자금인지 사실 가늠조차 힘들다. 그런데 내가 만일 내 보험이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어떨까? 혹은 이미 그 한도를 넘어섰다면? 너무나 비극적이지만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이런 걱정을 떨쳐버릴 수 없다. 실제로 사랑하는 이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는 '마지막 정산'을 해야 한다. 실제로 많은 노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남은 가족과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병원에 가지 않는 경우도 있고, 병원에서도 당신의 죽음의 순간에까지도 이런 고민으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대한민국도 어느덧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특히 2015년 미국 통계국이 발간한 '늙어가는 세계 2015(The Aging World: 2015)'에 따르면 2050년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2번째로 고령인구 비율이 높은 국가로 예상 추상 인구 4337만 명 중 1557만 명이 65세 이상이라고 하니 아마도 지금 이렇게 적극적으로 인터넷을 통해 개인 출판을 하는 우리들이 죽을 쯤이면 거의 다 노인들만 사는 세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조금 이른 고민 같지만 사실 현재에도 대한민국 인구 10명 중 4명 이상이 65세 이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 '웰다잉(Well-Dying)'의 고민은 꽤나 아직 시작되지 못한 늦은 고민이다. 특히 부동산과 관련되어서는 아예 시작되지도 못했다.


그런 점에서 아직은 생소한  이 '웰다잉 법'이 아마 지금의 20-30대가 생을 마감할 즈음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 특히 무엇보다 아직 농경사회의 문화와 관습, 그리고 그 정신을 따르고 동양권 문화에서 집이 가지는 의미는 서구권에서처럼 단순히 '개인적 성취' 혹은 '삶의 거처 혹은 보호처'의 의미를 뛰어넘어, '삶의 완성', '정착', '삶의 터전'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고, 모든 사람의 인생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웰다잉의 문제도 어느 순간 '집과 부동산'의 문제와 연관되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시기가 올 것이다.


사실 내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된 이유는 지난 3년 전까지 지난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어머니와 암투병을 곁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지난 10년의 투병기간 동안 세 번의 이사가 있었는데, 첫 이사는 암 진단 초기 1-2년의 시기에 우리 어머니가 10년가량을 지낸 집을 떠난 것, 그리고 이후 재발과 치료의 과정에서 대략 7-8년을 보낸 집을 떠나게 된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임종 6개월- 10개월을 앞두고 이사를 한 경험에서 왔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사실 지금도 나는 내가 어릴 적부터 고등학교까지를 보낸 그 소중한 공간에서 살고 있지 않음에 너무 안타깝고, 그리고 비록 이사를 하게 되었지만 고등학교 졸업부터 20대 중후반이 되기까지 어머니와 함께 가장 힘들었지만 동시에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을 보낸 그 공간에 지금 내가 살고 있지 않음에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암 치료를 위해 서울 근교로 이사한 마지막 집에서 어머니가 고작 1-2개월도 지내지 못하시고, 마지막 3개월을 병상에서 보내신 것 때문으로 인한 안타까움이 든다. 그리고 나는 다시 이사했고, 현재 어머니의 흔적이 남은 공간은 없다.


그 오랜 기간 투병을 하셨지만 늘 꼿꼿한 자세를 보여주고 싶으셨던 우리 어머니는 그 누구도 암환자라는 것을 알수 없을 정도로 건강한 모습을 유지하 셨었다. 암세포를 지니고 계셨지만 늘 운동을 하셔서 피부도 좋으셨고 옷은 늘 꼿꼿하게 다려 입고 다녀 아무도 암 환자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런 어머니가 상태가 악화되어 급하게 병원으로 입원하게 된 날엔 미쳐 당신의 방을 정리도 하지 못한 채 방을 떠나셨다. 정말 지난밤 누웠던 이부자리의 마무새가 남아있고, 화장대엔 마지막으로 쓴 화장품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방을 놔두신 채 떠나셨다. 그리고 결국 3개월 동안 그 방으로 돌아오지 못하셨고, 나는 어머니를 병원에서 보내드려야 했다.


마지막 순간을 내 공간에서 맞이하지 못하게 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그의 모든 것이 남아있는 공간이 아닌 곳에서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임종한 가족이 남겨놓은 모든 것을 마주하는 가족의 입장에서도 집에서 '웰다잉(Well-Dying)'을 준비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아픔이자 상처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제는 우리도 죽음(Dying)의 관점에서 우리의 집에 관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끼는 다른 사람의 죽음도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냈던 공간은 단순히 지구의 어느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아니라 그 사람 그 자체가 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언젠가 생에 어느 순간 '내 것'이라 생각되는 공간에서 내 인생의 마무리를 할 시기가 올 것이고, 되도록이면 그 순간을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맞이하기 위해서 부단히 조심하며 그리고 노력하여 살아가갈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과연 우리가 얼마나 죽음의 관점에서 우리의 집을 생각해보았을까? 단순히 병원이 아니라 집에서 죽는다는 것 그 이상의 의미로 말이다.


사실 나도 정답을 알지는 못한다. 사실 서점에 지금이라도 당장 서점에 가면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 혹은 '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서적에 비해 사실 '어떤 죽음이 좋은 죽음인가?' 혹은 '어떻게 죽는 것이 가장 좋은 죽음인가?' 등에 대한 서적은 부족하고, 또 인기도 없다.


우리는 죽는 것을 결정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인지에 대한 노력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할 수 있다. 결혼, 육아, 집을 포기한 소위 3포 세대인 우리는 사실 아직 우리의 제대로 된 집을 가지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다. 아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웰다잉'의 문제를 물리적 공간과 소유물에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곳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노력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 이 공간 우리의 집에 관하여 생각하며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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