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한 경험이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다른 영화 같으면 관객들이 좌석에서 일어나 출구쪽으로 우루루 몰려나갔을 텐데 숨소리 하나 없이 일제히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극장 안이 너무 경건해서 마치 법당에서 큰스님의 설법을 들은 수도승들이 강론이 다 끝났음에도 깊은 울림을 준 그 여운을 흩트리지 않기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잠시 뒤에 스무 명쯤이 자리를 떴고, 나머지 서른 명 가까운 관객들은 쿠키 영상이 끝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조명 빛에 드러낸 관객들의 얼굴은 거의 비슷했습니다. 깨달음과 희열과 감동이 뒤섞인 숙연한 표정. 처음 보는 일이어서 잠시 혼란스러웠습니다. 뭐지? 묘한 느낌이었지만 공감할 수 있다는 건 기쁨이고, 희망이기도 했습니다.
빔 벤더스 감독과 히라야마(아쿠쇼 코지)의 만남. 이렇게 완벽할 수 있을까요? 차들이 질주하는 도로와 보도블록의 거리, 그리고 공원의 푸른 나무들과 매일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상이 깨달음을 주고, 침잠하게 하며, 감동까지 주니 묘한 느낌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거기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 다규멘터리에 가까울 정도로 극도의 절제된 대사와 아날로그적인 감성의 씬을 통해서 무의미하게 순간적으로 사물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의 관계를 포착하고, 통찰해서 인생을 투명하게 담아냈기에 울림이 더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부에나 비스타 쇼셜 클럽>을 봤을 때의 느낌이 되살아나는 듯 했습니다.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 난 뒤, 몇 가지 느낀 점을 정리해봅니다.
첫째, 시부야의 화장실 청소부인 히라야마의 과거 서사에 대한 생략은 마치 일본 전통시의 하이쿠처럼 여백처럼 느껴졌습니다. 그건 비어있음이 아니라 ‘40년 간 레미콘 기사를 하다가 퇴직하고 편의점을 냈는데 지난겨울 화재로 모든 걸 다 잃어버린 박씨 아저씨’나 ‘이혼을 한 뒤 세 아이를 키우느라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을 분식점 주방에 다 묻어버린 우리 조카’ 혹은 ‘사업실패로 가족동반 자살을 시도했지만 아내와 자식은 죽고 자신만 살아남아 처절하게 지옥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노숙자 홍씨’의 인생으로 채워지고, 환원되기 때문입니다. 과거 서사를 세밀하게 묘사했더라면 <퍼펙트 데이즈>는 시가 아니라 신파에 가까운 드라마가 됐겠죠.
둘째, 히라야마의 일상은 결코 반복이 아닙니다. 그게 단순한 반복이라면 감동이 그렇게 컸을까요? 매일매일 일상의 순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며, 깨달음이었기에 감동과 경이로움을 주는 거죠. 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건 어제의 세상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삶에 대한 깨달음이고, 교감인 거죠. 쉬운 것 같아도 우리가 그걸 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본주의적인 소비 성향과 물질적인 소유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적인 소비와 소유욕은 일상을 생산만능의 기계처럼 움직여 인간을 생산수단으로 전락시키죠. 돈이 정의가 되고, 챔피언인 사회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원하는 건 욕망 에너지가 빵빵해져서 결코 지치지 않는 거죠. 히라야마의 젊은 날도 그랬을 겁니다. 그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욕망의 부질없음을 깨달았을 때, 개안을 하게 된 거죠. 그게 히라야마의 현재 이 순간을 가능하게 한 겁니다.
셋째, 저녁노을로 붉게 물든 도쿄의 전경을 풀 샷으로 찍어 오프닝 씬과 클로징 씬으로 배열하고, 중간 두 번 인터컷으로 똑같은 장면을 보여준 건 지금 이 순간에 대한 경이와 예찬의 서사입니다. 그 순간은 물리적 시간이나 공간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타성을 벗어난 인식과 정신을 의미합니다. 그 순간들은 낱개로 존재하지만 서로 관계를 맺습니다. 그런 점에서 ‘퍼펙트 데이’의 단수가 아니라 ‘퍼펙트 데이즈’의 복수인 건 당연하죠. 지나간 과거의 순간은 현재의 그림자로 재현되고, 미래를 예시하기도 합니다.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란 사유가 따를 때 현존재가 되고, 나의 인식이 선행될 때 본질을 넘어서 실존이 되듯이 사소한 것들과 순간들이 서로 묶이고 연결되어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만든다는 게 <퍼펙트 데이즈>의 영화적 메시지가 아닐까 합니다.
넷째, 매력적인 인물들이 정말 많이 등장합니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돈 없으면 연애도 못하는 세상이라고 일갈하는 타카시도 그렇고, 그가 화장실 청소를 할 때면 나타나는 친구 테라도 그렇습니다. 테라는 만나기만 하면 타카시의 귀를 만지는 게 일입니다. 아니, 귀를 만지기 위해 찾아오는 건지도 모르죠. 헌데 타카시는 싫어하는 기색 하나 없이 툭 한마디 내던집니다.
“얘, 진짜 친구는 귀고, 나는 그냥 덤이지.”
타카시의 여친 아야. 타카시가 무척 좋아하지만 돈이 없어 사랑을 이루지 못하죠. 노랑머리의 아야는 전투적이면서도 데카당스한 아우라를 풍깁니다. 히라야마에게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볼 키스를 하고, 떠나는 장면은 마치 황석영의 <삼포가는 길>에서 백화가 기차역에서 정씨와 영달에게 “내 이름은 백화가 아니에요. 본명은요……이점례예요.”와 데칼코마니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운터에 붙박이로 앉아있는 서점의 여주인도 무림의 고수 같은 분위기를 풍깁니다. 히라야마가 사려고 집어든 책을 보고, 툭툭 던지는 말 한마디로 작가를 평하는 게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코다 아야는 너무 저평가 되었어요. 같은 단어를 써도 이 분이 쓰면 완전 다른 느낌이 난다니까.”
“페트리샤 하이스미스가 불안이라는 단어를 쓰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죠. 그녀는 공포와 불안이 다르다는 걸 나한테 알려줬어요.”
히라야마가 휴식 시간에 샌드위치를 먹기 위해 동네 공원(신사) 벤치에서 만나는 여자. 히라야마가 눈인사를 할 때,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뻘쭘한 눈빛을 보이죠. ‘나한테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그런 차가운 감정의 눈빛은 결코 새로운 게 아니죠. 우리 주변에도 정말 많습니다. 사람의 따뜻한 시선을 야수의 눈빛으로 착각하는. 그와는 달리 화장실 틈에 꽂힌 쪽지의 OX 빙고놀이를 통해 교신하는 건 사람이기에,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죠. OX로 칸을 다 채웠을 때, thank you라는 메모를 남긴 이의 따뜻한 마음이 오롯이 전해졌습니다.
동네 이자카야 술집 여주인의 전남편인 토모야마. 7년 전 이혼했지만 암에 걸려 전처인 마마를 보러와 술집 안에서 포옹하고 있는 걸 히라야마가 보게 되죠. 히라야마를 뒤따라온 토모야마가 마마에 대해 늘어놓는 말과 푸념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마마를 만나러온 이유를 두서없이 늘어놓다가 진실을 털어놓죠. 헤어진 애인을 보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이리도 잘 표현했을까요.
“갑자기 사과를 하고 싶었습니다. 특별히 잘못한 일이 있는 건 아닌데. 사과라기보다 감사하고 싶었어요. 아니, 그것도 아닌 것 같고. 그냥 보고 싶었습니다.”
암환자의 체념어린 어조도 공감이 됩니다.
“아직도 모르는 게 많은데 결국 아무 것도 모른 채 이렇게 끝나는가 봅니다.”
빼놓을 수 없는 인물. 동네 공원에 비닐 텐트를 치고 사는 노숙자. 나무를 끌어안고 정령의 춤을 추는가 하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려 교신을 하기도 하죠. 나중에는 그가 살던 비닐 텐트를 벗어나 도시 한복판 횡단보도로 나가 두 팔을 벌리고, 세상을 향해 소리없는 함성을 외치죠. 나한테는 이렇게 들렸습니다.
‘자본주의의 소비와 욕망이 진정으로 너희를 행복하게 하느냐!’
서울에도 비슷한 거리의 선지자가 있습니다. 건대입구나 종로에 불쑥 나타나 팻말을 들고 있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인생은 모두 부업일 뿐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본업이다. 부업에 목숨 걸지 말고, 본래의 할 일로 돌아오라. 재가 되기 전에’
다섯째, <퍼펙트 데이즈>의 매력은 음악과 아날로그 감성의 씬입니다, 카세트로 듣는 Lou Reed의 Perfect Day, The Velvet Underground의 Pale Blue Eyes, Van Morrison의 Brown Eyes Girl, Nina Simone의 Feeling Good, The Animals의 The House Of The Rising Sun, Otis Redding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가 귀를 흠뻑 취하게 합니다. 거기다 구형 OLYMPUS 사진기로 햇살과 나뭇잎을 찍고 인화해서 출력하죠. 흑백의 모호한 형상들의 씬들은 생명의 순간과 흔들림을 기억하기 위해 남기는 거겠죠.
여섯째, <퍼펙트 데이즈>의 압권이자 절정은 운전대를 잡고 도로를 질주하는 히라야마의 표정을 원테이크로 찍은 씬입니다. 처음에는 침잠하는 표정이었다가 웃음을 짓고, 그러다가는 우는 듯한 표정으로 바뀝니다. 히라야마가 살아온 삶의 여정이 그 표정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정으로 다 보여준 거죠. 어떤 사람들은 아쿠쇼 코지의 영화적 여정이 완성된 씬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영화적인 차원을 넘어 욕망을 다 가라앉히고, 작은 것이 곧 우주이고, 그것이 정말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자의 표정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사족 – 영화적 관습을 깨는 건 실제의 삶에 더 가까이 있는 인물에 대한 천착이 따를 때만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