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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수의사 Aug 25. 2023

아는 수의사

경의선 책거리 벤치에서 든 생각

  경의선 책거리는 마포구 경의선 폐선부지에 있는 공원길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는 연남동의 '연트럴파크'와 이어지기도 하는 활기찬 공원이다.

  이곳을 알게 된 지도 벌써 칠 년 정도가 되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이름이 경의선 책거리라고 되어있길래 경의선일 것 같은 철도는 있는데 공원이라기엔 나무들이 너무 작고 책과 관련된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아서 무슨 의미일까 궁금했다. 책거리라.. 초등학교 때에 하던 책거리가 잠깐 생각났다. (학기 말 즈음 교과서를 끝낸 기념으로 책거리를 한다며 과자 같은 것들을 나눠먹는 날이 있었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그것을 과자파티라고 하더라.) 


  하지만 알고 보니 이곳은 책의 거리라는 의미가 맞고 내가 이곳을 알게 되었을 때가 이제야 막 공원길이 조성 되었을 무렵이어서 군데군데 심어져 있는 벚꽃도 작았고 다른 수목도 키가 크지 않은 소담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된 세월만큼 제법 울창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들이 많아졌다. 요즘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아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지난 칠 년 동안 책도 지속적으로 많아졌다.

  나는 이 길을 좋아한다.

  풀밭 사이에 등을 비비며 햇살을 맞는 낭만 고양이들을 보고 있으면 내 기분도 좋아진다. 이 길에 사는 낭만 고양이들은 다른 지역에서 만나는 길냥이들에 비해 유난히 깨끗하고 뽀송뽀송하며 여유가 넘친다. 사람들과의 유대도 좋아서 하루에도 몇 번씩 모델 포즈를 하며 자신을 촬영하는 사람들에게 화답을 한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곳을 자주 찾는 분들이 낭만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다 보니 한 아이가 여러 개의 이름을 갖게 되기도 한다. 치즈였다가 네로였다가 다롱이였다가. 물론 나도 그렇게 내 마음대로 이름을 지어서 부르는 이들 중 한 명이다.


  보호자와 함께 산책을 즐기는 사랑스러운 강아지들도 좋다. 

  산책을 나온 것이 너무 신나서 짧은 다리를 바쁘게 움직이며 짧지만 매우 빠른 보폭으로 보호자의 발걸음을 맞추어 걷는 귀여운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아서 여기저기 다 냄새를 맡고 다니느라 보호자는 일분에 채 몇 발 가지도 못하고 강아지에게 '이제 좀 가자'하는 눈빛으로 목줄을 지그시 잡아당기게 만드는 호기심쟁이 모험가들도 있고 다른 강아지들에게 반드시 존재감을 드러내야 해서 마주치는 강아지들 마다 우렁찬 샤우팅을 선보이며 보호자를 난감하게 만드는 발성쟁이들도 있다.

  

  그런 아이들을 벤치에 앉아서 가만히 보고 있을 때면,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인다. 강아지들의 걸음걸이, 눈빛, 호흡 등 원내에서 신체검사를 하듯 스캔을 하게 된다.

  마치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남자 주인공이 읽고 싶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머릿속을 읽었던 것처럼, 나 또한 특별히 신경 써서 보려고 하지 않았음에도 강아지와 고양이들의 불편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생각은 곧 ‘저 보호자는 저 아이가 불편하다는 걸 알고 있을까? 아파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로 이어지곤 하지만 곧 침묵을 지킨다.

  나에게 진료받으러 온 환자들이 아니므로.

  그렇다. 나의 직업은 수의사다.

출처 : veterinarian-taking-care-of-pet-dog: Freepik.com


  내 나름 워라밸 유지를 한답시고 병원이 아닌 곳에서는 진료와 관련된 행위를 하지 않으려 애를 쓰는 편이라 병원 밖에서는 나의 직업을 잘 밝히지 않는 편이다. 소아과 의사나 수의사들이 본인 집주소를 알만한 사람들에게는 직업을 밝히지 않는다고 들은 적이 있다. 아주 응급한 경우는 119를 부르거나 바로 응급실로 가겠지만, 약간 애매한 증상이 있을 때, 밤 중에도 찾아와 문을 두드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은데 의사로서 응답을 안 할 수도 없고 대부분이 별 일 아닌 경우이다 보니 그럴 때마다 상당히 피곤하다고…

  사실, 난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거니와 밖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이 내 직업에 대해 딱히 궁금해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나 혼자 착각하고 오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좋아하는 이곳 경의선 책거리에서 마주치게 되는 몸이 불편해 보이는 강아지, 고양이들을 보면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낯선 이의 도움에 불편함을 나타내는 모습이 꽤나 일반적인 요즘 사회이지만, 그래도 이곳에서는 아끼고 사랑하는 반려동물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진정성을 갖고 다가갔을 때에 나에게 힘든 마음을 털어놓고 조언을 받아들여주고 감사함을 표현해 주었던 보호자들이 있다.


  병원이 아닌 곳에서, 어쩌면 보호자와 강아지에게 더 익숙한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어서인지 아니면 가운을 입지 않은 그저 평범해 보이는 내 모습 때문인지 더 편한 분위기에서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주는 것 같았고 짧은 시간의 대화 만으로도 꽤나 친해진 느낌, 다음번에 만날 때는 이젠 아는 사이가 되어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생각했다. 평소 진료실에서는 환자에게 초점이 맞춰지고 보호자의 이야기를 통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으려고만 했었다. 하지만 내 새끼가 아픈데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보호자는 없으며 반려동물 치료에서 보호자의 마음 상태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점을 간과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내가 애초에 이들의 '아는 수의사'였다면, 그들의 마음을 보듬어주고 공감하며 필요한 이야기를 먼저 해주고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도울 수 있지 않았을까.

출처 : cute-little-dog-impersonating-a-business-person: Freepik.com


  그래서 이렇게 내가 갖고 있는 지식과 경험들을 이야기로 써보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고 이 글을 통해 여러분의 '아는 수의사'가 되어드리고자 한다.



  그날은, 초 여름의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산책을 하다가 나이가 많은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보호자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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