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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네디 Aug 17. 2023

알바체 혹은 실까체

작년 이맘때 일이다.

얼음이 녹으며 시간대별 농도를 달리하는, 단순함 속의 다양함이 좋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시는데 그날따라 왜 인지 달콤한 커피가 당겼다. 


눈에 띄는 지척의 커피 전문점으로 냉큼 가 종류는 기억나지 않는 달콤한 커피를 주문했더니 직원이 하는 말,


"휘핑크림 올리실까요?"


누구한테 무슨 의미로 하는 질문인지 잘 안다. 다만 질문 형식에 어울리는 답을 하고 싶었다.


"그러실걸요"


뭐 이런 놈이 다 있느냐는 의문스러운 표정 반에 황당한 표정 반을 섞은 반응이 재밌다.

그날처럼 불쾌지수 높은 날씨가 아닌 쾌적한 날에는 어땠을지 궁금한 그녀의 고객응대.

어딜 가던 열에 다섯은 그랬다.

어느 편의점에서 남자 직원이 '현금영수증 괜찮으실까요?'라고 묻길래 '현금영수증님 아마 괜찮으실걸요',

은행에서 'OOO 고객님 맞으실까요?'라는 질문에 '제가 OOO인데 맞고 싶지는 않네요.'라고 답했다.

인터넷을 뒤지니 안경점의 누구는 '어지러우실까요?'라고 물었단다.


내게 뭔가 청유하고자 함인지, 제삼자의 안위나 의향을 묻고자 함인지, 문장 형식에 따른 뜻을 따지자면 상황과 인칭에 어긋나는 표현들이 사람들 입에 입을 거쳐 바이럴 마케팅하듯 퍼지고 있다.


나는 알바체 혹은 실까체라 칭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확인 삼아 물으니 내 경험과 추측에 다름없이 젊은 아르바이트생들을 시작으로, 이제는 세대를 초월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한다.

팬데믹, 인포데믹과 함께 lingudemic or languademic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사실 난 이전부터 이런 경향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래 가주구", "해가주구"


'그래서', '해서'라고 간단히 말하면 될 것을 왜 굳이 '가주구'라는 촌스런 군더더기를 붙여야만 하는지 도무지 이해 안 가 가주구.


귀엽게 보이려는 의도인지, 언어 구사력이 달리는 나머지 다음 말할 문장 구성을 위해 잠시 생각할 시간이라도 벌어 볼 요량으로 억지로 갖다 붙인 건지, 길게 늘어뜨린 그 발음이 무척 거슬린다.


'바램'을 '바람'으로 고쳐 쓰라는 맞춤법 검사 기능의 붉은 성화에 순응하고, 

한때 자장과 짜장, 무엇이 바른 표기인지 조속히 구분해 주기 바라며 혼란스러워했던 내 입장에서는 심히 유감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을 상대로 바르고 고운 우리말, 표준말 쓰자는 선비질이 아니다. 

비아냥으로 비칠지 모르겠으나 실상 내 속내는 권장에 가깝다.


언어는 습관이요, 습관은 세뇌된 행동을 부른다.

'그런 거 하나쯤이야'로 치부하고 말 일로 여기기 쉽지만, 의식을 확립한 성인이 아닌 어린아이들에게 그 작은 위반이 하나둘씩 반복적으로 쌓이면 언어영역 점수뿐만 아니라 정서와 윤리의식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 자명하다.

못된 짓을 일삼으며 '촉법소년'임을 당당히 밝히는 불량학생들의 언어가 고왔던가?

필요, 충분, 필요충분조건을 따지기 애매한 문제 이긴 하나, 올바른 언어를 구사하는 학생이 그렇지 않은 학생에 비해 비행(行)을 저지를 확률이 지극히 낮다는 명제를 거짓이라 할 이는 없음이 분명하다.

'욕만 아니면 된다?'

범죄만 저지르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하던 상관없다는 말로 들린다.

공산국가가 아니면 후진국으로 살아도 된다는 의미로 와닿기도 한다.


알다시피 아이들은 민감하다.

민감한 아이들에게 맞는 말을 들려주어야 한다.

민감한 아이들에게 틀린 말을 무제한으로 주입하면서 그들의 준법의식을 조금씩 갉아 없애지 말자는 주장이다. 

그렇게 하기로 모두가 약속했다면 그렇게 해야 하며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

편하다고 입에 붙는다고 툭툭 내뱉는 말이, 걸리적거린다고 더럽다고 길가에 휙휙 내 던지는 쓰레기와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하얀 휴지를 던졌다고 그것이 아름다운 쓰레기로 기억되는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를 향한 몇 가지 걱정의 하나가 언어였다.

또래 아이들과 섞여 지내며 잘못된 표현을 익히지 않을까 하는 우려,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처지였기에 근심은 더욱 컸다.

몇 년이 지난 4학년 겨울, 

아이와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던 중 아이가 사진을 보냈다.



나였다면 자칫 '부시지 마세요'라고 했을 가능성 컸을 테지만 고맙게도 아이는 바르게 표현해 주었다.

어린 시절 아빠가 강조하던 바른말을 여전히 생활화하고 있는 듯해서 한시름 놓았고, 내가 바라는 훈육을 잘 해내고 있는 아내에게 감사했다.


요즘 부모들이 자주 일컫는 훈육의 개념이 내겐 참으로 모호하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더욱 그렇다.


훈육의 뜻을 검색하면  '사회적 규제나 학교의 규율과 같이 사회적으로 명백하게 요청되는 행위나 습관을 형성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이라 하던데 정작 '실까요', '가주구' 등 사회적으로 명백히 요청되는 표준말, 바른 표현이 아닌 어눌하고 경솔한 사람들에 의해 변질된 표현, 언어로 훈육하려는 모순. 


여기까지 읽고도 내 논리를 비약으로 결론 내릴 이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1. 카지노 분야에서 오랜 세월 일했던 경험으로 수백, 수천억을 잃고 폐인 된 이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을 지겹도록 겪었고, 그들 모두 시작은 만원, 십만 원 단위였다는 사실.

2. 뒤늦게 배운 술에 빠져 한 잔, 두 잔 마시기 시작해 결국 알코올 중독에 이른 사람이 부지기 수고 심지어 간경화와 각종 합병증에 유명을 달리한 이들이 우리 주변 곳곳에 있었다는 사실.

3. 지금 당신의 모습이 과거 당신이 바라던 미래의 성공한 모습이 아니라면, 귀찮다고 미룬 작은 일 하나 둘이 모여 나태의 산을 이루게 하였기에 그리 됐다는 사실.


반복은 중독과 확산을 일으킨다.  

아이는 민감하다.

잘못된 언어는 민감한 아이에게 중독과 확산을 일으켜 그릇된 행동을 야기한다.

무도한 인간들 그래서 실패한 인간들 가득한 곳에서 오랜 기간 그들을 지켜본 사람의 말,

부디 믿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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