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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성 Jul 23. 2022

실크로드 기행 4 : 자위관

인위적인 경계는 한없이 덧없다

 장예(張掖)의 고속열차역인 장예서역(張掖西站)에서 어제 칠채산 일정을 함께 했던 청두에서 온 형을 우연히 다시 만났다. 오늘 하루 더 장예에 머무르려다 일정을 바꿔 자위관(嘉峪關)으로 간다고 했다. 나 역시도 자위관으로 가던 길이었기에 자연스레 동행이 되었다. 고속 열차로 한 시간 거리인 자위관남역에 내려 시내 외곽 어느 호스텔에 짐을 풀고, 본격적으로 자위관에서의 일정을 시작했다.


 자위관은 명대(明代)에 세운 만리장성의 서쪽 끝 관문이자 이 관문이 위치한 시의 이름이다. 동쪽 산둥반도(山東半島)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시작한 만리장성은 6350km를 이어져 이곳 자위관(嘉峪關)에서 끝이 난다. 명나라 때까지는 이곳이 중국의 경계였다. 진(秦)나라 때부터 북방의 유목민족을 막기 위해 쌓기 시작한 만리장성은, 실제로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는 데는 거의 무용지물이었고, 오히려 중원의 한족 국가는 스스로 만리장성을 넘어설 때 가장 번영했으니(한나라, 당나라, 그리고 현재의 중국도 포함해서), 만리장성은 정말 웃픈 역사의 산물이자, 중국인들 스스로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을 만한 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 자위관
자위관 성벽, 멀리 칭장고원(靑藏高原)의 설산이 눈에 들어왔다.
자위관은 총 세 개의 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만리장성은 이 곳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6400km 떨어진 산해관까지 이어진다.
가장 바깥쪽 관문, 이 문에 자위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우리는 장예에서와 마찬가지로 호스텔에서 불러 준 핀처를 타고 자위관 시 외곽에 있는 유적 세 군데를 다녀왔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자위관 관문. 만리장성에 대한 내 박한 평가와 별개로 관문 자체는 굉장히 볼만했다. 보통의 만리장성이 산세에 있는 것과 달리 이쪽은 광야에 위치해 있었는데, 황량한 광야에 홀로 우뚝 서있는 관문의 모습이 굉장히 웅장해 보였다. 중간에 계속 보강을 하긴 했지만 관문 자체는 1372년 명나라 때 세워진 그것이라 했다. 지금에 와서 봐도 이렇게 멋지고 웅장한데, 먼 옛날 황량한 사막과 광야를 지나 이곳에 이르른 사람들이 느낀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멀리 나갔다가 돌아오는 중국인들은 드디어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서역에서 오는 외국인들은 처음 마주하는 웅장한 중국에 경외감을 느꼈을 법도 했다. 그렇게 자위관 견학을 끝내고 다음으로 향한 곳은 현벽장성이었다.

현벽장성
현벽장성
현벽장성
현벽장성

 현벽장성(悬壁長城)은 자위관 서쪽 7km 지점에 위치해 있는데, 자위관 군사 방어 체계의 일부로, 자위관과 그 서부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장성이다. 본래 흙성이었는데 1987년 복원하면서 석성으로 복원을 해놨다. 너무 쌩뚱맞고 조악하게 복원을 해놓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중국 전역에 흔하디 흔하게 널려있는 그저 그런 날림 복원에 한두 번 실망한 게 아니지만서도, 조금만 더 정성스럽게 복원을 해두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떠나지 않았다. 뭐, 장성과 별개로 흑산(黑山)이 주는 정취가 나름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날 일정의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장성 제1돈'이라는 곳이었다.

옛 장성의 흔적들
이 협곡을 경계로 장성 제1돈이 서있다.
장성 제1돈
장성 제1돈
장성의 흔적은 제1돈까지 이어져 있었다.

 장성 제1돈(長城第一墩)은 만리장성의 제일 서쪽에 위치해 있는 돈대(墩臺)여서 '제1돈'이라 한다. 이곳은 군사들이 주둔하면서 적의 동태를 살피는 곳인데, 오늘날의 초소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이곳이 당시 국경의 마지막이자 첫 초소이니, 여기가 딱 당시 중국의 경계인 셈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내가 중국에서 키르기스스탄으로 국경을 넘어갈 때도 중국 출입국사무소를 통과해 중국군 마지막 초소를 지나 국경을 넘었고, 키르기스스탄군 첫 번째 초소를 지나 키르기스스탄 출입국사무소로 들어갔으니, 자위관은 출입국사무소, 제1돈은 중국군 마지막 초소에 해당된다고 보면 될 듯하다. 국경 초소로서의 기능을 잃은 지 족히 수백 년은 되었을 테고, 그래서 그런지 그냥 그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마치 장성이라는 인위적인 경계의 구분이 덧없음을 증명하듯이, 쓸쓸하게.

 그렇게 일정을 마무리 짓고 예상보다 일찍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 근처 꼬치집에서 아주 이른 저녁부터 이어진 저녁 겸 술자리는 둘이 맥주 한 짝을 끝내고 거하게 취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액면가는 77이지만 실제 나이는 87인 소용(肖勇) 형은 쓰촨 성 청두에서 작은 전동기 대리점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는데, 집 떠나 이렇게 멀리까지 여행을 온 건 처음이라고 했다. 아니, 어쩌면 쓰촨 성을 떠나온 게 처음인지도 몰랐다. 가족과 나라와 당을 사랑하는 전형적인 순박한 중국인이었는데, 나는 처음에 고생기 가득한 그의 얼굴과, 중졸 기름밥이라는 그의 이력에 미안하게도 선입견을 갖고 경계했었다. 하지만 소 형은 누구보다도 착한 영혼의 소유자였고, 중국 역사와 국제 정세에 대해 웬만한 중국 대학생들보다 훨씬 더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학력이나 직업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내 천박한 오만함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가 그와의 대화에서 다시금 증명이 되었다.


 술과 꼬치를 너무 많이 먹어 토를 할 것만 같고, 100m도 안 될 숙소까지 가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겨우 돌아온 숙소에서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는데, 옆 침대에서 다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통화하는 중국인의 목소리가 더 이상 성가시게 느껴지지 않는다. 중국 생활 5개월에 나도 이미 동화되었나 보다. 이런 걸 동화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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