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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굶찮니 Jan 18. 2024

마음이 울... 적!같을 때는 산책

생각이 잘 안 나면 일단 걸어 본다

글감이 생각이 안 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업무가 겁나게 하기 싫을 때는 저절로 멀티태스킹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손으로는 PPT나 출결 정리를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Sea Pearl! Oh! Sea Pearl! 바다 진주. 날 퇴근시켜 줘. 빨리 뭐라도 써 재끼고 싶다.'라며 똥글 리스트를 좌라락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어떤 랩퍼는 다른 랩퍼들 랩네임만 좌르륵 라임 맞춰 모아서 노래를 하나 만들어 냈는데, 사실 내 메모장에 있는 제목만 엮어도 글 한 편은 나오겠다 싶다. 그만큼 세상에 나온 똥글보다 아직 쓰이지 않은 리스트가 많다. 이렇게 내가 당신들의 눈건강, 뇌건강을 생각한다 이 말이다. 미안하다. 


그럼에도 어떤 날에는 시간도 많고, 커피도 많고, 드립칠 똘끼도 충만한데 노트북 앞에만 서면 멍하니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는 날도 더러 있다. 그동안 유희왕 카드 모으듯 모아놨던 똥글 리스트에서 도무지 쓸 만한 소재가 안 보인다. 당시에는 기발하고 쓰고 싶다 생각했어도 막상 꺼내 보면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디테일이 생각이 안 나서 폐기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면 당시에는 정말 기발하다 생각했는데, 꺼내는 시점에서 이미 뒷북 철 지난 수박이 되었기에 화제성 포함 노잼인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나는 걷기로 했다. 원래 위대한 과학자나 철학, 사상가들은 아이디어를 산책 중에서 뽑아낸다고들 하지 않던가. 물론 똥 싸다가도 높은 확률로 뽑아낸다고 하지만.


예전에 교토 홀로 여행을 할 때 은각사 옆에 있는 '철학의 길(哲学の道)'을 걸어 본 적이 있다. 사실 나는 그날 철학을 추구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초저녁에 어울리는 커피와 디저트를 파는 곳을 찾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초저녁이 되자 칼같이 문을 닫아버리는 가게가 많아서 그냥 하염없이 걷기만 했다. 당시에 나는 타임어택 비스무리하게 교토의 관광 스폿(Spot)을 정복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지친 상태였다. 하루에 네다섯 곳을 찍다 보니 이걸 관광했다고 해야 하나 스르륵 훑고 갔다고 해야 하나.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뭔가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아닌 하나의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끌어온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아무 생각을 안 하는 순간이 아마 없을 것이다. 그냥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은 그것을 생각(고민, 고찰, 고뇌)의 범주라고 여기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주 작은, 수많은 잡념들이 하나의 '고찰거리'로 포착이 되고, 나는 아, 이렇게 아이디어가 조합이 되는구나 하고 또 혼자 천재 놀이를 하고 말았다. 


원리야 어찌 되었든 신기하게도 그냥 걷다 보면 어떠한 생각이든 떠오르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가급적이면 한산한 산책길에 가로수도 적당히 있고, 한쪽에는 작은 천이 흐르는 저녁시간이 좋겠다. 조깅이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너무 많으면 나도 마치 뛰어야만 할 것 같아 정신 사납고, 개를 끌고 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으면 귀여워서 못 참는다. 


마음이 울적할 때도 산책은 은근히 도움이 된다. 폭식을 막아주고 충동 코인노래방을 억제한다. 만약 분쟁을 겪은 직후라면 '아~ 그래서 싯푸럴 상대방이 뭣 같다고 나에게 그런 소릴 했겠구나'하고 깨닫는다. 차로는 가야 할 거리를 걸어 나와 집과 꽤나 멀어졌구나 생각이 들면 세상 참 좁고 별 거 없구나 깨닫기도 한다. 그렇게 멀어 디지겠다고 생각한 나의 먼 출근길도 하찮게 짧아진다. 철학자는 못 되어도 마음이 철같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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